돈 꾸러 다니는 게 하루 일과

▲ 박종규 회장

직원들이 이 때 동원했던 자금은 전문 사채꾼의 돈은 아니었지만 사적으로 융통해온 부채이기 때문에 일종의 사채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 자금에 대해서 갚을 기한과 이자까지를 정해서 조금씩 상환해 나가도록 했다. 그러나 직원들에게서 돈을 빌려 쓴 경험은 곧 이어서 전문 사채꾼에게도 손을 벌리게 되는 사태로 발전하고 말았다. 직원들에게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 그리고 일반 자금을 마련할 능력을 회사는 갖고 있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이때부터 사채꾼들의 돈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사채가 고리대금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을 해보니 정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월 이자는 3부였는데 양편이자로 일주일을 8일로 치게 되니 연리 48%였다. 이런 사채 빚을 갚을 돈이 없으니까 다시 사채를 빌려서 메우다 보니 금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마치 악마가 굉음을 내면서 맹렬하게 불어나는 것 같았다. 1억 2천만원이었던 부외부채는 1년 후에는 2억원이 됐고 그 다음해에는 3억원, 다시 그 다음해에는 4억 5천만원으로 불어났다, 이것이 불과 7년 후에는 22억원에 다다르게 됐다. 배를 많이 팔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채는 줄어들지 않고 늘기만 했다. 그야말로 사채는 무시무시한 공포덩어리였다.

회사가 점점 어려워지자 임직원들은 정상적인 업무를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는 것이 일과가 돼버렸다. 물론 그 중에서도 자금을 담당하는 자금팀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금팀 책임자인 김영세 상무(현 우남케미컬해운 회장)와 임진석 부장(전 국제콘트롤 부사장)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회사를 지키기 위한 자금 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영업팀의 경우도 화물을 수배하고 운임 협상을 하는 일은 제쳐두고 운임을 수금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날짜가 지나면 부도가 나는 것이기 때문에 은행 담당자들을 퇴근하지 못하게 붙들어 놓고 저녁 8시, 9시가 돼야 겨우 자금을 구해 급하게 은행으로 달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정이기에, 임직원들은 별을 보고 출근했다가 별을 보고 퇴근하는 일을 거의 4년 동안이나 반복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사장까지 흔들리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일부러 태연한 척 연기를 해야만 했다. “내 사주팔자에는 부도란 게 없어. 그러니 걱정들 하지 말고 최선을 다 합시다”라는 말은 이즈음 내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직원들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되겠기에 유머를 섞어 써가면서라도 직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매일같이 새벽에 조깅을 하면서 “까짓 거 어떻게 되겠지, 최선을 다 해보자”하고 스스로 다짐을 하곤 했다.

개미지옥보다 무섭다는 사채의 고리를 끊는데 성공하기까지 거의 7년여의 세월이 필요했다. 1985년경부터 세계 석유화학경기가 다소 회복되기 시작했고 그동안 뼈를 깎는 구조조정 작업이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었다. 과잉 선복을 많이 처분하면서 사채를 일부라도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것은 정부가 1984년부터 시작한 해운산업합리화 조치였다. 이 때 우리 회사는 몇 개사를 통합해 한국특수선 주식회사로 확대 발전이 되면서 운영자금을 지원 받음으로써 사채를 완전히 일소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이처럼 사채에 혼이 난 이후에 우리는 ‘절대로 사채는 쓰지 않는다’는 것을 내부 경영원칙으로 삼게 됐다. 이것은 사채뿐만 아니라 비싼 금리로는 돈을 절대로 차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정한 것이다. 우리 회사는 오늘날에도 보험회사에서 자금을 빌려 쓰지 않기로 유명한데, 이러한 원칙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행의 금리도 비싸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파업 전날 찾아온 선원노조위원장

1980년대 초반 7년간의 경영 위기를 잘 넘겼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 해결 과정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특히 어떤 때는 상여금은 물론 월급마저 체불돼 대책없이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직원들의 고통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원들의 월급까지 체불되면서 우리 회사에서 가장 큰 압력을 받고 있는 사람은 김형주 선원노조위원장이었다. 선원들의 월급이 체불되자 노조원들은 선원노조에 대고 “뭐 하고 있는 것이냐”며 화를 내거나 심지여 욕설을 퍼붓는 일까지 자주 있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총무부장 등을 통해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본사로 올라와 항의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적어도 회사에서 돈을 빼돌리거나 부도를 가장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김 위원장과는 가끔 언성을 높여 말다툼을 한 적도 있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원노조의 인내심도 월급이 밀리기 시작한지 3년쯤 돼가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4년 2월에 불만이 쌓인 선원들이 경영자측에 파업에 들어가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체불을 3개월씩이나 하고 상여금은 2년 동안 한 푼도 못 받았으니 화가 난 선원들이 파업을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파업 전날 김 위원장이 서울 본사로 나를 찾아왔다. 김형주 위원장은 “사장님께서 선원들을 설득할 안을 제시해 주시지 않으면 파업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파업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실은 요청이 아니라 최후 통첩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선원들의 요구와 주장이 구구절절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상 참아달라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파업하겠다는 말 이해합니다. 파업 하시려면 하십시오”라고 말해버렸다. 그리고는 뒤이어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는데, 파업을 하는 게 후련하다고 생각되면 도리가 없습니다. 앞으로 좋은 회사에 가셔서 먹고 사시죠”하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낙담했고, 나는 미안하면서도 참담한 심정이었다. 김 위원장과 나는 저녁 늦게 사무실을 나와 회사 근처 복국집으로 들어갔다. 이제 마지막이니 둘이서 술이나 한번 실컷 먹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서로 위로를 해가며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술이 취한 우리 둘은 우리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침 집사람과 아이들이 집을 비운 날이라 김 위원장의 늦은 방문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집에서는 보관돼 있던 위스키를 마셨는데 술이 잔뜩 취한 김 위원장이 집 안팎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다.

“사장 집 한번 더럽게 형편이 없구만. 걸레 같은 집에서 사는구만. 뭐 이런 집이 다 있어? 우리 선장 집보다도 못하잖아 이거. 난 갈래요, 이런 집에서는 안 잘래. 내일 아침에 선원들이 모이면 파업 결의를 해야지. 정말 거지같은 집에서 사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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