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극복하게 해준 勞使간의 신뢰관계

▲ 박종규 회장

한참을 비난을 해대던 김 위원장은 말리는 나를 뿌리치고 부득불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버렸다. 나는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 선원들이 모일 것이고 오전 중에 회의를 하면 파업에 돌입한다는 통지가 오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회사의 운명은 끝나는 것이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해 선원들의 파업 결정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12시쯤 돼서 부산 현장에서 온 연락은 노조원들이 파업을 안 하기로 결정했다는 희소식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알아봤더니 김 위원장이 부산에 내려가서 노조원들에게 우리 집에 와봤던 얘기를 하면서 “우리 선장들 사는 것 보다 못한 집에 사는 사장이 감춰놓은 재산은 있을 턱이 없고, 그동안 회사를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양심상 내 입으로 파업 선언을 할 수가 없다”며 파업선언 철회를 주장해 관철시켰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노사분규로 인한 회사의 파국만은 면할 수가 있었다. 후에 김위원장은 이와 관련 “우리 회사 임원진들이 사심 없이 경영하고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에 파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밝혔다.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원인은 회사와 노조간에 상호 불신이 도화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노사간에 신뢰가 쌓여 있다면 회사가 파업으로 가는 사태로까지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며, 설사 파업이 일어난다고 해도 수습이 빠르고 후유증이 적게 마련이다. 우리 회사의 경우는 노사간에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파업이라는 파국만은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회사는 이미 1970년대부터 회사와 사원들간에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었다. 1970년대에는 선원이 되고 싶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육상근무자들의 2~3배 월급을 받는 선원에 대한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일반 선사의 선원으로 채용되려면 선사의 채용 관계자들에게 뒷돈을 줘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회사의 경우는 뒷돈 거래 등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선원들에게 술을 접대하면서 입사를 시키곤 했다. 또한 선원들은 절대로 밀수를 하지 않는 풍조였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근무할 수가 있었다.

이 당시 우리 회사 사규에는 보너스를 300% 지급하도록 돼 있었다. 이것만 해도 사실은 당시 선사들 중에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77년에는 연말 결산에서 이익이 많이 나니까 200%를 더 증액해 총 500%의 상여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 보너스를 받아서 큰 맘 먹고 집을 사는 선원들까지 있었다.

육상 임직원들은 해상직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배려를 하는 분위기였다. 나도 자주 우리 선박에 승선해 선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나는 방선하기 2~3일전부터 선원들의 인사카드를 보고 얼굴과 이름을 전부 외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선박을 방문했을 때 말단 선원들의 이름까지를 부르면서 수고한다고 격려의 말을 해주면, 선원들이 매우 놀라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마워했다.

1970년대부터 이렇게 선원들과 유대관계가 깊었고 서로 신뢰하게 돼 선원들은 어려운 시기에도 참고 기다려줬던 것이다. “예전에 사정이 좋을 때 잘해 주었으니 나쁠 때는 참고 기다리자”는 공감대가 선원들 사이에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사간의 신뢰가 불황 극복에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 개척한 중공항로

매우 어려운 시기이긴 했지만,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고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형편이 어려우니 자산 매각이나 하고 어음을 막느냐고 여기저기 뛰어다닌 것이 전부였던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만약에 우리가 그 어렵던 시기를 정말 위축된 상태로 그저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다면 아마 회사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고 진작 망해 버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들은 어려운 속에서도 똘똘 뭉쳐 영업활동에 더 심혈을 기울였고, 새로운 항로 개척에 치중해 악전고투하는 속에서도 필요한 선박은 반드시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그 어려운 시기에 중공항로(그 때는 수교이전이었으므로 중공항로라는 말을 썼다)를 개척한 것도 그러한 일면의 하나다.

1982년 초에 국교도 없는 공산국가 중국을 연결하는 중공항로에 우리 배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주로 가는 기항지는 천진(天津)항이었는데, 우리 선원들이 천진항을 갔다 오기만 하면 관계당국에서 한사람씩 불러서 조사를 하는 바람에 선원들은 중공항로 배를 타기를 몹시 꺼렸다. 선원들 입장에서는 중국이 공산권 국가라 기항을 해도 육지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관계당국에서 끌려가서 이것저것 조사나 받으니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공항로에 실리는 화물은 한중간에 국교가 없기 때문에 3국간을 경유해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형식으로 거래가 되는 화물들이었다. 그만큼 중공항로는 운영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예를 들어 삼성물산은 홍콩이나 일본을 통한 간접 무역방식으로 톨루엔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는데, 우리 배는 중국에서 바로 한국으로 화물을 싣고 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한번은 중국당국이 천진항에 입항한 우리 선박 아로마케미캐리호를 관세법 위반으로 억류한 적이 있다. 수출금지국인 한국에 물건을 팔면서 서류상으로만 일본으로 판 것으로 신고해 사실상 밀수를 한 것이고 그 밀수품을 우리 배로 운반했으니 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중국측은 선장이 재판을 받고 구류를 살든지, 아니면 3만 달러의 벌금을 내든지 하라고 통첩을 해왔다. 우리는 이런 중국당국의 처사에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그로 인해 우리 배는 한달 넘게 억류됐다. 우리 선원들은 한 달 이상을 배에서 내리지 못해 고통스런 생활을 해야만 했다.

후에 삼성물산이 3만 달러의 벌금을 내주어서 억류가 해제되긴 했지만, 우리 배가 인천항에 기항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으로 직항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게 됐다. 중국은 억류를 해제해 주면서 우리 배가 한국항에 입항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지바항에 입항해 하역을 했다는 근거서류를 중국측에 제출하도록 명령을 했던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하주 요구대로 인천항에다가 짐을 풀면 일본에 기항했다는 증빙서류를 만들 수 없고, 그렇다고 받아 줄 사람도 없는 일본을 먼저 들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배에 물품 공급을 위해서라도 인천항에 기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선장에게 일단은 인천항에 기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서류를 위조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고, 일본에 입항했다는 가짜 서류를 만들어 홍콩을 통해 중국당국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같은 우리의 보고가 허위임이 금방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일본 동경에 주재하는 중국 총영사가 지바항만국을 직접 방문해 사실 여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돼 우리 배 아로마케미캐리호와 이종달 선장은 중국을 다시는 기항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우리 회사 입장에서는 애써 개발한 이 항로를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업이란 그만큼 모질고도 끈덕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취항 선박을 패트로케미캐리호로 바꾸어 계속해 중공항로 사업을 영위해 나갔다. 문제의 아로마케미캐리호는 다른 항로로 전배(轉配)돼 취항하다 1985년 9월에 매각이 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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