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경영학 박사(한국국제상학회 이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팀장)

▲ 이기병 박사

‘군수산업의 대명사’, ‘조직의 미쓰비시’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일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Mitsubish, 三菱)의 창업자는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 Iwasaki Yataro)다. 야타로는 1870년 선박 3척을 가지고 해운업에 뛰어들어 기업 역사의 첫걸음을 내디뎠고 1873년 미쓰비시상회를 설립했다. 하급 무사 출신인 야타로는 일본 근대사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Sakamoto Ryoma)와 동향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과 친분을 맺었고 1874년 일본의 대만(Taiwan) 침공시 군수품과 병력의 해상운송을 책임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재벌로 성장하는 밑거름을 조성했다.

야타로는 같은 해 오사카 시대를 마감하고 본사를 도쿄로 이전하면서 국유회사인 일본국우편증기선회사(日本國郵便蒸気船會社)와 미쓰비시상회를 합병해 우편기선미쓰비시회사(郵便汽船三菱會社)를 설립, 해운업을 핵심 역량사업으로 정해 ‘해운왕’이라는 명성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야타로 사망 이후 회사명은 다시 미쓰비시로 변경됐다.

1885년에는 라이벌 경쟁사였던 교도운수를 인수합병, 주력이었던 해운업을 닛폰유센(日本郵船)이라는 신설법인을 설립해 양도했는데 이 회사가 오늘날 일본 해운회사인 NYK Lines이다. 일본 3대 선사로 성장한 NYK는 2018년 경쟁선사인 MOL, K-Line과 컨테이너 정기선 부분 통합시켜 오션 네트워크 익스프레스(Ocean Network Express ; ONE)는 새로운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해운업을 분리한 뒤 미쓰비시는 조선업과 중공업 등에 매진해 급성장했는데 특히 일본 정부로부터 해운업과 밀접한 나가사키 조선소를 불하받은 후 초대형 군수 기업이 됐다.

초대형 군수 기업으로 성장한 미쓰비시와 우리나라의 악연은 18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쓰비시는 1875년 통상체결 요구 조건으로 개항을 강요한 일본의 강화도 침략시 군사들의 수송을 맡았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 국제법의 틀에서 맺은 최초 조약이면서도 강압적이고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미쓰비시는 우리나라의 아픈 근현대사에 쓰라린 의미를 남긴 일본 기업으로 기억되고 있다. 첫째 미쓰비시는 태평양전쟁 시기에 조선인 강제동원을 가장 많이 한 1위 기업이었고 최대 작업장을 보유했다. 290여개의 노무 작업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학계에서는 신중하게 다루고 있으나 한국 및 일본 사회에서는 ‘미쓰비시 10만명’ 동원설을 정설처럼 여기고 있다.

미쓰비시의 작업장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거센 공분을 일으켰던 곳이 나가사키의 섬 하시마(HashimaIsland, 端島)다. ‘지옥 섬’, ‘감옥 섬’, 군함을 닮아 ‘군함도’라고 불리는 대규모 강제동원이 이루어졌고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역사 왜곡의 논란을 일으켰다.

둘째 미쓰비시는 조선인을 고용하면서 약속된 임금을 주지 않고 일본 당국에 공탁형태로 미불임금을 가장 많이 남겨둔 1위 기업이기도 하다. 미쓰비시는 나가사키 조선소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포함 약 1만 1천명을 공탁했는데 스미토모는 4,400여명, 미쓰이는 2,700여명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개인이 받아야 할 돈이 공탁금으로 변신해 소멸하지 않고 일본 정부가 관리하면서 개인한테 지급하지 않는 것이 현재 강제동원사의 해결되지 못한 현안 과제 중 하나다.

최근 들어 미쓰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한국 대법원의 배상 책임을 이행하지 않아 미쓰비시 중공업의 한국자산들이 강제집행 절차들이 검토되는 등 사회적 이슈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미쓰비시 특유의 관료적인 병폐, 군수사업을 기반으로 한 소비자 경시 풍조, 인권에 대한 인식 없는 이익추구, 상의하달식 보수적인 기업문화 등이 그 근본적 요소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려면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들에게 배상 및 책임을 요구하는 동시에 일본 특유의 보수적인 조직문화 논리보다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우리 스스로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글로벌화에 입각한 ‘경제의 논리’를 그들이 따르도록 한국 경제 전반에 걸쳐 ‘스케일 업(Scale-Up)’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미쓰비시가 중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자발적 배상’을 한 배경에 중국 정부와 언론의 단합된 힘과 전범 기업으로서의 기업이미지 탈색, 중국 시장 확보가 필요한 ‘실리적인 경제적 판단’이 있었음을 복기해야 한다.

우리가 자강(自强)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혁신의 걸림돌은 과감히 파괴하고 모든 산업 분야에서 융·복합 경쟁력을 확보해 한국 경제의 ‘근원적 변화(Deep Change)’의 변신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짬뽕과 카스테라가 유명한 나가사키의 맛집도 있지만 원폭피해를 강조하며 피해자를 주장하면서 많은 강제동원의 노동 인권이 탄압되었던 또 다른 나가사키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을 ‘분노의 역사’로서만 인식하고 피해자 의식에 매몰돼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이를 제대로 기록하고 교육하며 역사의 퇴행을 막는 올바른 인식도 갖는 한편 경제에 있어서는 한국 특유의 빠른 의사결정을 기반으로 한 실행력을 보여 ‘성과와 속도’를 창출해야 한다.

그 선봉에 해운·조선업을 비롯한 물류업이 괄목할 만한 실적을 끌어내 움츠린 한국경제의 활력을 일으키고 만성적인 대일무역 적자 궤도를 벗어나 흑자로 탈바꿈하는 데 크게 공헌한다면 그늘 속에 가려진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넋이 많은 위로를 받을 것 같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