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선 운항선사 3사 통합에 나서다

▲ 박종규 회장

우리 회사의 역사를 보면 고난의 연속이었다. 동해조선 문제가 끝나서 안정을 찾는가 싶었는데 오일쇼크가 찾아왔고 이어진 극심한 해운불황 속에서 회사의 존속여부가 안개에 쌓이는 불안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1978년 연말에 찾아온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해 세계경제가 크게 휘청거리더니 1980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그 후로도 1984년까지는 불황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산업 가운데서는 특히 해운업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오일쇼크로 인해 원유 소비가 줄어들면서 탱커 시황은 곤두박질쳤고, 반면에 석탄 수요가 늘어나면서 건화물선 시황은 급등했다. 이렇게 되자 너도나도 벌크선을 발주하면서 1980~1981년의 일시적인 호황은 끝이 났고, 1982년 말 쯤에는 모든 선종(船種)이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게 됐다. 이런 상황이 우리 회사에게만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찾아온 해운불황은 신흥해운국으로서 ‘사해약진(四海躍進)’이라는 대통령 휘호처럼 해운입국(海運立國)을 내세운 한국에게 불행하게도 가장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정부의 해운산업 진흥정책에 따라 선박, 특히 벌크선을 많이 들여왔던 외항 국적선사들은 엄습한 해운불황에 속수무책으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1982년부터 우리 상선대가 해외에서 유류대 미불, 항비 체불 등의 이유로 억류되는 사태가 연이어 일어났다. 1982년의 외항해운업체 결산 자료를 보면 총 59개 외항선사 중에 적자를 낸 곳은 47개 업체였고 총 결손액은 1023억원이었다.

잘 아려진 대로 이러한 해운산업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부는 오랜 연구 끝에 1983년 12월 23일 ‘해운산업 합리화 계획’이라는, 업계 재편과 부실 해운회사 정리를 골자로 하는 정책을 부총리가 주재하는 ‘산업정책심의위원회’에서 의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합리화 계획의 주요 골자는 1984년 11월까지 63개 외항선사를 17개 그룹선사로 통폐합하고, 이에 순응한 선사에게는 조사감면, 원리금 상환 유예 등 정책적인 지원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합리화 계획’에 따라 9개사가 합친 ‘범양상선’이 탄생했고 대한해운도 몇 개의 계열회사를 거느린 회사로 재편됐으며, 5개사가 합쳐서 후에 ‘두양상선’이라는 회사도 탄생하게 됐다.

이같은 정부의 해운산업 합리화 계획을 따르지 않고 독자 생존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한국케미컬해운도 어떤 그룹선사이든간에 끼어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케미컬 탱커 위주의 특수한 선사였기 때문에 그것이 만만치 않았다.

하나의 그룹회사를 만드는 문제를 놓고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조그만 내항 가스 탱커 회사를 운영하는 고교 후배였다. 그러나 그 회사의 재무제표를 분석해 본 결과 많은 사채를 쓰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등 경영 내용이 상당히 부실한 것으로 나타나 나는 적당한 구실을 대며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돌려보냈다.

냉동선사까지 인수 ‘한국특수선’ 탄생

다음에 찾아온 사람은 냉동선을 운항하는 일우해운 사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우해운과는 통합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냉동운반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아하니 일우해운도 엄청난 부채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우해운과 2개사만 합친다고 했을 때 정부당국이 이를 합리화 조치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일우해운이 어떤 로비를 했는지, 어느 날 최훈 해운국장(전 철도청장)에게서 전화가 와서 한국케미컬해운과 일우해운, 미원통상 등 3사가 합쳐서 특수한 그룹 선사를 만들 것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당밀을 들여오는 미원통상은 괜찮다는 판단이었지만 일우해운은 아무래도 한데 통합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일우해운은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정부 시책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당국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한국케미컬해운이 중심이 돼서 특수선들을 운항하는 통합선사를 만들라고 구체적인 지시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미원통상과의 통합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미원통상은 당밀 운반선 4척을 처분하고 해운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당밀운반선 4척만 시가대로 매입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우해운과의 통합은 골칫거리였다. 일우해운은 냉동선 5척을 중심으로 호주-한국 간에 소고기를 운송해왔는데, 호주에서 소고기 수입이 줄어들면서 영업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자료를 보니 일우해운의 자산은 냉동선 5척 뿐이었고 감정가는 38억원에 불과했다. 반면에 부채는 296억원이나 안고 있었으니 일우해운의 경영진들은 그동안 많은 속을 썩어왔을 것으로 짐작이 됐다.

일우해운을 통합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강제로 정부당국에서 하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 가장 큰 문제는 부채 296억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케미컬해운 자체로도 부채가 150억원이나 됐는데, 거기다가 부채를 더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관건은 냉동운반선 시황이 앞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인데, 3년 후에는 호주로부터 소고기 수입이 재개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3년만 잘 버티면 사업성이 나쁠 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리해 1984년 6월에 한국케미컬해운, 미원통상, 일우해운 3개사가 공동운영선사를 설립하고, 우리 회사가 주축이 돼 세 회사의 선박을 매입해 나간다는 약정서를 쓰게 됐다. 운영회사의 이름은 특수선을 운항하는 선사그룹이니까 ‘한국특수선’이 어떠냐는 해운국장의 아이디어를 따라서 그대로 쓰기로 했다.

주거래 은행 바꿔 과다부채 문제 해결

운영선사 ‘한국특수선’에서는 우선 미원통상의 당밀운반선 4척을 매입했다. 다음은 일우해운의 냉동운반선 5척을 매입해야 했으나 거기에 딸려있는 부채 296억원의 처리가 문제였다. 자산인 38억원을 연리 11.5%로 계산했을 때 합계액이 296억원이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를 계산해 보았다. 결론은 12년 거치 13년 분할상환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우리는 이러한 안을 일우해운의 인수 조건으로 제시했다.

일우해운의 주거래은행인 산업은행에서는 일우해운이 부도직전으로 몰리자 다급한 마음에서 이 안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한국케미컬해운의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에서 이같은 안을 반대하고 나왔다. 기존의 부채도 있는데 296억원을 추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산업은행은 하는 수 없이 서울신탁은행에 한국케미컬해운이 지고 있는 부채 150억원을 갚아 주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고 이 바람에 한국케미컬해운의 주거래은행은 산업은행으로 바뀌게 됐다.

이 문제 해결과정에서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동해조선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떠안았던 미지급 이자 33억원이다. 우리는 선사의 통폐합 조치가 단행되는 이 때를 이용해 이 33억원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 부채까지 산업은행으로 끌고 가서는 산업은행에서 한국케미컬해운의 부채 150억원을 안아주는데 동의할 수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신탁은행으로 구기환 행장을 찾아가 문제의 33억원을 없던 것으로 해달라는 사정을 했다. 하지만 구기환 행장은 “아직 상환 기일이 멀었으니 그 때 가서 천천히 갚으시오”라고 말하면서 요지부동의 태도를 보였다. 할 수 없이 나는 다시 33억원을 현가 계산방식으로 계산해 5억 6천만원을 당장에 갚겠다는 제의를 했다. 이 안을 서울신탁은행측이 받아들이면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완전히 해결되게 된 것이다.

1984년 6월 27일 드디어 한국케미컬해운과 미원통상, 일우해운 3사가 합자해 설립한 한국특수선주회사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선대는 미원통상의 당밀 운반선 4척, 일우해운의 냉동운반선 5척, 그리고 한국케미컬해운의 선박 10척 등 모두 19척이었고 한국케미컬해운의 자산 일체도 운영선사인 한국특수선㈜으로 모두 이관됐다.

대표이사 사장에는 한국케미컬해운 전무였던 장두찬씨가 취임했고 미원통상과 일우해운에서도 임원급이 한사람씩 파견돼 실무를 맡게 됐다. 이리해 우리 회사는 석유화학제품 운송선사에서 당밀과 냉동화물도 운송하는 그야말로 특수한 화물을 전문으로 운송하는 선사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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