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치덩어리 일우해운 냉동운반선 5척

▲ 박종규 회장

우리가 우려했던 대로 일우해운에서 인수한 5척의 냉동운반선이 골치 덩어리였다. 인수하고 보니 이 냉동선들은 3500~5000톤의 소형선박들이었는데 원양항로에 뛰기에는 엔진 성능이 너무 좋지 않았다.

소형선박이라도 냉동선인 만큼 바닷고기 등을 싣기 위해서는 아주 먼 바다를 가야하는데, 엔진이 약하다보니 고장이 잘 나고, 그에 따라 수리비가 많이 나오는 것이 문제였다. 일부 선박은 아예 운항할 수도 없을 만큼 엔진 상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단종된 엔진을 장착한 선박을 산 것이라서 수리할 수 있는 부품이 없어 고장이 나면 해결책을 찾기 어려웠다. 또한 사고가 잦았던 탓에 보험료는 엄청나게 높아져 있어 큰 부담이 됐다.

이런 상태의 내동선이 제대로 취업도 못하고 놀고 있었으니 선원 임금을 체불한 것은 물론이요, 항구마다 자재비, 항비 등이 밀려 있어서 배가 해외 항구에 들어갈 때마다 압류를 당했다. 사실 법적으로야 선박을 인수한 회사에서 이전 회사의 항비, 유류대 등의 미불금을 지불해 줘야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배가 일단 압류되면 청구금액만큼을 해당 국가의 법원에 보증금으로 걸어야 배를 빼낼 수가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배가 며칠이라도 잡혀 있게 되면 운항차질로 인한 손해와 하주에 대한 신뢰도 손상 등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를 회피해야 하나 당시로서는 그럴 사정이 아니었다. 냉동선이 가는 곳마다 압류를 당해 압류된 횟수만도 12번이 넘었다. 더구나 압류자가 제시하는 증빙서류 중에는 우리들이 배를 인수할 때 전혀 파악하지 못한 내용까지도 들어 있어서 우리들을 당황시켰다. 1985~1986년은 일우해운에서 인수한 냉동선 때문에 내 흰머리가 엄청나게 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는 당초 냉동선이 시황은 어렵더라도 한 3년 동안만 잘 버티면 수요가 늘어나 시황이 좋아질 것으로 판단했다는 얘기는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더구나 일우해운은 축협이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소고기의 독점 수송권을 갖고 있어서 소고기 수입만 재개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었다. 더구나 냉동선을 5척이나 보유한 회사는 우리밖에 없었으므로 화물 확보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 나는 축협과 축산 관계 연구소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검토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서 3년만 참으면 사업성이 있다는 판단을 하고, 일우해운의 냉동선을 과감하게 인수하기로 했던 것이다.

산업의 변화를 잘못 읽은 쓰라린 경험

그러나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우리의 이러한 전망은 잘못된 것이었다. 냉동선에 대한 수요예측은 제대로 한 것이었지만 냉동화물과 관련된 산업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잘못된 예측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전망했던 대로 정부에서는 1988년 말부터 외국으로부터 소고기 수입을 다시 개방했다. 이제 우리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르려나보다 하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소고기 수입이 재개되고도 냉동선에 대한 수요는 살아나지 않았다. 정기 컨테이너선에 냉동컨테이너가 실리게 되면서 소고기 수입은 대부분 냉동컨테이너를 이용하는 쪽으로 운송 패턴이 바뀌어간 것이다.

냉동선은 수송비는 쌀 수 있으나 화물창 전체를 육고기로 다 채워야 채산성이 나오고, 더구나 운송시간이 길기 때문에 운송시간이 짧은 냉동컨테이너와는 경쟁력을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냉동선들이 갑자기 모두 무용지물이 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기다려 왔던 소고기 수송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 사실을 상기해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냉동선에 대한 시장 전망은 잘 했지만,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술적인 변화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이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한 것이었다. 해운산업의 꽃은 역시 컨테이너운송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케미컬화물만 계속 취급하다보니까 주류업종인 컨테이너운송사업에 대한 동향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패착이다.

해운업에 종사하는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에게 나는 컨테이너, 벌크, 탱커 등 여러 가지 화물의 동향과 기술적인 발전의 조류에 대해서 폭 넓은 시야를 가지고 공부를 해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하고 싶다.

소고기 수입에 참여도 못한 냉동선 5척은 후에 뉴질랜드와 페루 사이에 양고기 수송에 투입돼 숨통이 좀 트였고, 그 후 뉴질랜드와 극동간의 과일 수송, 대만과 한국간의 바나나 수송 등에 투입돼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다 1991년에 바나나 수입이 전면적으로 자유화되면서 영업을 활성화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바나나도 잘못 밟고 미끄러지다

1990년에 바나나의 국내 가격은 kg당 6000원으로 국제 시장 가격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다. 따라서 수입이 전면 개방되면 엄청난 물량이 쏟아져 들어올 것으로 예상됐다. 우리의 냉동선들도 이 바나나 수입 개방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당시 예상으로는 1991년도에 약 28만톤이 수입될 것으로 전망됐는데, 이는 1990년의 총 수입물량 2만 3000톤의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우리들은 당연히 큰 기대를 갖고 국내 수입업자들과 상당한 물량의 수송 계약을 체결하게 됐다.

1990년 1월부터 바나나를 실을 수 있는 우리의 냉동선 3척이 바쁘게 움직였다. 냉동선 5척 중 신선한 공기를 주입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선박이 3척뿐이었기 때문에 이 3척을 투입해 주로 에콰도르에서 한국으로 수입되는 바나나를 실어 날랐다. 필리핀, 태국 등지로부터 한국으로 수입되는 바나나는 메이저 회사인 델몬트, 돌 등이 직접 수송하기 때문에 한국의 수입업자들은 주로 남미에서 바나나를 수입해 오고 있었다.

1991년 1월 바나나 수입이 개방되자 국내 소비량도 급증하면서 수입업자들은 떼돈을 벌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부산항은 바나나 수입 배들로 가득 찼고, 하역을 하는 데만도 5~6일이 걸릴 정도로 체선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나나 소비가격이 계속해 떨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1kg당 6000원 하던 것이 수입이 개방된 1991년 1월 2500원으로 떨어지더니 2월과 3월 지나면서 계속해서 가격이 하락했다. 한해에 2만 3000톤 정도를 수입했던 바나나가 1991년 1월부터 4월까지 넉달 동안 무려 10만 4000톤이 수입이 됐으니 가격이 하락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가격이 하락하자 수입업자들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뛰어든 중소 수입업자들이 생산 현지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 바나나 가격을 올려놓았으니 타격은 더욱 컸다. 결국 수송비도 건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부산항에 도착한 화물을 인수하지 않고 도망치는 업체들이 속출했다. 심지어 수송중인 바나나를 바다 한가운데다 버리는 업자들까지 있었다.

수송한 바나나에 대해 운임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우리 회사는 큰 손해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1991년 총 매출액이 400억원에 달했지만 수입업자가 도산하는 바람에 받지 못한 운임 채권만 30억원이 넘었으니 엄청난 결손을 보게 된 것이다. 잔뜩 기대를 했던 우리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결손을 보고 말았다. 바나나를 잘못 밟고 그대로 미끄러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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