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드는 수입, 결국 냉동선 운항 포기

▲ 박종규 회장

이것도 돌이켜 보면 역시 바나나 시장의 특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시장에서 기선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만 앞선 나머지 바나나 수입 물량을 확보하는 데만 신경을 쓴 것이 잘못이었다. 시장이라는 것은 냉정하다. 충분한 연구와 준비 없이 의욕만 앞서서 뛰어든다면 반드시 혹독한 수업료를 내도록 요구하는 법이다.

바나나 수송 이후 냉동선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았다. 마침 페루 앞바다의 오징어 어장에서 한국선단이 진출해 조업을 했는데 이 수송권을 두고도 해운회사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 때 우리는 낮은 운임을 제시한 선사를 제치고 독점 수송권을 따내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1994년까지 호조를 보였다. 우리는 수송할 선박이 모자라 경쟁국인 러시아 선박을 용선해 투입하기도 했고 제5 리퍼호는 어선에 석유를 공급하는 유류공급선으로 개조해 운항했다. 1994년의 경우 총 11척을 용선 투입해 총 166억 3000만원의 냉동선 운영 수입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시절도 금방 끝나고 말았다. 엘리뇨 현상이 나타나면서 어획량이 계속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4년 166억원이었던 영업수입은 1995년 116억원으로 떨어졌고 1996년 다시 106억원으로 감소했다. 오징어 수송계약을 장기로 체결했기 때문에 선박을 바로 철수시킬 수도 없었다. 피해를 그대로 감수하면서 계속 운송을 해야만 했다.

여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소련 체제가 붕괴되면서 러시아와 동구권 냉동선들이 세계시장에 흘러나와 저가 운임공세를 펼치는 바람에 냉동선 사업은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부진한 영업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96년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수역의 어장까지 진출했지만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냉동선 사업을 계속할 것인지 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냉동선들이 1972년도에서 1975년 사이에 건조된 배들이기 때문에 신조 대체선을 투입해 사업을 계속할지, 아니면 여기서 사업을 접을 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결국 우리는 냉동선 사업을 포기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정에 따라 1997년 5월 제2리퍼호 매각을 마지막으로 문제가 많았던 냉동선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내항선사까지의 통폐합 요구 거절하다

우리 회사 선단의 변화를 살펴보면 1969년 12월말에 창업을 하고 1970년 8월에 제1케미캐리호를 첫 번째 도입한 이후 케미컬 탱커와 가스 탱커가 꾸준히 늘어나 1979년말에 사선만 무려 27척을 보유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 19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계속된 해운불황의 여파로 많은 선박을 처분해야 했고 일부는 대형선으로 교체되면서 보유 선박 척수는 계속해 줄어들었다. 이러다 보니 창업 30년 후인 1999년 말에는 케미컬 탱커 사선이 겨우 6척 밖에 없었다.

단순히 선박 척수만을 비교하면 회사의 사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록 척수가 줄었지만 사선은 모두 중고선이 없이 신조선이었고 그것도 종래의 것들보다 훨씬 대형화된 선박들이라는 점에서 무게감은 과거 보다 더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고선을 여러 척 가지고 있다가 소수 정예화된 최신예선을 가진 선사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탱커선사들은 오일쇼크 이후 경영이 크게 악화됐다. 실어 나를 화물이 갑자기 줄어든 상황에서 가지고 있던 선박을 처분하지 못한 내항선사들은 더욱 문제가 심각했다. 이에 따라 일부 내항해운업체 중에는 외항선사들이 해운합리화 시책에 따라 통폐합을 하는 만큼, 내항선사들도 정부시책에 맞춰 통폐합을 해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내항선사들은 대부분이 통합 대상 선사로 석유화학 수송의 대명사인 우리 회사를 지목해 통합하자는 얘기를 하려고 했다. 이들의 로비를 받았는지, 최훈 당시 해운국장도 나를 불러서는 “기왕에 특수선 회사를 발족 시키시는 것이니 내항 케미컬 선사들도 다 통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 우리 회사가 중심이 돼 내항 케미컬선사까지 통합을 하게 되면 당장에는 사업을 독점할 수 있어서 좋을지는 몰라도 경쟁이 없는 시장이 돼 온실의 화초처럼 스스로 약해질 것이기에 곤란하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직원들이 안일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또한 경기가 좋아지게 되면 대기업이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문제였다. 차라리 어렵더라도 경쟁을 통해 강한 체질의 기업을 만들어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내항 케미컬선사들은 해운 통폐합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부가가치 높은 화물 수송에 전념하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회사가 특수선 분야의 전문 수송업체이니까 그 분야에서 독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케미컬 수송 분야는 그야말로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이 심하다보니 내항업자들이 외항까지 진출해 우리의 고객을 빼앗아 가는 일도 있어서 우리는 많은 피해를 입어왔다. 그럴 때 마다 우리 직원들은 운임을 더 내려쳐서 내항선사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그러나 나는 그 때마다 “우리 회사가 업계의 리더인 만큼, 작은 회사들도 먹고 살도록 해야 한다”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부가가치가 높은 화물을 찾아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우리는 SM, AN, LPG, VCM 등 대부분의 연안화물을 내항선사들에게 다 내주게 됐다. 사실 내항업체들과 죽기 살기의 싸움을 했다면 우리 회사가 질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나는 사업의 의미를 ‘새로운 부가가치의 창출’이라는 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남이 안하는 일에 집중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가급적 업계와 마찰이 없는 부가가치 높은 화물의 수송에 전념하다 보니 케미컬 탱커 5~6척만 보유 운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보다 두배 세배 많은 캐미컬 탱커를 보유한 선사들도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장 점유율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 만약에 우리가 내항선사들과 제살깍아먹기식 경쟁을 펼쳤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소형선대만 운영하는 작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고를 전환한 것이 KSS해운이 오늘날과 같이 대형 가스선을 운항하는 업계 최고의 전문선사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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