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을 부른 가스선 운송사업의 전환

▲ 박종규 회장

전세계를 휩쓸던 해운불황은 1987년을 고비로 서서히 물러가더니 1989년부터는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석유화학분야는 한국과 중국 등 신흥국들이 석유화학 시설을 계속 확장하면서 순풍을 맞이했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지방의 경제성장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우리 회사도 매출이 꾸준히 증가하고 보유선박도 점차 신형선, 대형선으로 교체되면서 경영이 호전됐다. 1987년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한 우리 회사는 1991년까지 5년동안 연속 흑자를 기록하는 쾌거를 거뒀다. 그 후 92년부터 96년까지는 냉동선 부문의 침체로 인해 다시 적자에 빠지기는 했지만, 매출액의 신장세는 계속돼 98년에는 74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경영 수지면에서도 97년 이후에는 다시 3년 연속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매출액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사업구조 면에서 질적인 변화도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보유선단이 젊고 덩치가 큰 선박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회사의 선박이 많을 때는 27척의 소형 중고선들이 근거리항로에서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들 소형선들은 모두 퇴역하고 덩치가 큰 신예선들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보유선박은 10척으로 줄어들었지만, 10척 모두가 선령 5년 정도의 신예선들로 과거의 소형선보다 월등하게 큰 선박들이었다. 거기에다가 그 중 3척은 3만~5만톤급의 대형 가스선이었다. 근해의 케미컬 운송 사업에서 월드와이드항로의 가스선 운송사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암모니아 수송 시장에서는 대형 암모니아 전용선을 운항함으로써 아시아지역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우리가 소형 케미컬선 운송에서 가스선 운송사업으로 방향을 튼 것은 1980년대 초중반을 강타한 해운불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때 해운불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경쟁이 심한 액체 케미컬 운송 사업에서 벗어나 향후 다가올 가스시대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1980년 봄 월급도 제대로 주기 어려운 심각한 상황에서 종업원들의 연수회에서 내가 ‘가스선단 중심의 전략’을 밝힌 것은 단순히 종업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스선 수송 도와준 고마운 두 사람

가스선 수송을 얘기하자면, 먼저 떠오르는 고마운 인물이 두 사람 있다. 한 사람은 일본 도긴리스(東銀리스)의 다카시마(高島) 부장이요, 다른 한 사람은 히요시산업(日吉産業)의 사노(佐野) 사장이다.

1986년 여름 가스선 시황은 대단한 불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만간 시황이 회복될 것으로 전망했고, 그에 따라 중소형 압력식 탱커인 썬멀리온호를 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선가 205만 달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불황이어서 돈을 빌려줄 국내은행은 아무데도 없었고, 해외에서도 돈을 빌리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도긴리스의 다카시마 부장은 1970년대 초반부터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는 친구사이였다. 동경에 가면 의례 그를 만나서 식사도 같이하곤 했었다. 썬멀리온호 도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경에 갔던 그 때도 나는 의례 했던 것처럼 다카시마 부장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200만 달러만 있으면 배를 한 척 살 텐데 돈 빌릴 곳이 마땅치 않아서 고민”이라고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그는 사업설명도 하기 전에 “알았어. 꿔 줄게”하고 바로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즉석에서 선박도입 자금 지원을 약속한 것이었다. 약속을 못 지킬까봐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도긴리스는 정말로 돈을 꿔줬다. 그것도 파격적으로 착수금도 없이 선가총액 205만달러 전액을 지원해 주었다.

이렇게 해 매입한 썬멀리온호는 후에 우리가 매각을 해 많은 차익을 남김으로써 우리 회사에 큰 이득을 안겨주었다. 1986년 9월에 선박을 도입할 당시는 선가가 비교적 낮았지만 그 해 겨울부터 선가가 뛰기 시작해 불과 1년 3개월만인 1987년 12월에 우리가 이 선박을 매매할 때는 355만 달러에 달했다. 1년 3개월 동안 운항 수입을 올리고도 매각을 통해 200만 달러 이상의 순이익을 확보한 것이다. 다카시마씨의 우정 어린 도움으로 우리 회사는 더욱 탄탄한 기반을 다지게 된 셈이다.

두 번째 얘기한 히요시산업의 사노 사장은 압력식 탱크를 설계하고 공사를 감리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었다. 히요시산업은 직접 시공을 하지는 않지만 설계를 함으로써 가스 탱커 부문에서는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회사였다. 1970년대 초반에 일본 내항을 뛰는 소형 가스선들은 대부분 이 회사의 압력식 탱크를 탑재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 배를 도입할 때 압력식 탱크에 균열 등의 문제가 있는지를 체크하기 위해 이를 설계한 당사자인 히요시산업의 사노 사장에게 자주 자문을 받게 됐다. 배를 파는 선주들은 언제나 탱크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설계를 한 당사자라면 진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양심적으로 얘기를 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도와주자고 지은 배가 엄청난 이익 남겨

히요시산업의 사노 사장은 이런 나를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다. 내가 사고자 하는 배의 탱크 상태에 대한 자세한 평가를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탱크에 균열이 의심될 경우는 사지 말라는 충고까지 해주었다. 그는 가압식 탱크가 탑재된 선박을 구할 때마다 항상 친절하게 대해줬고, 그런 다음에는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하도 고마워서 사례를 하려고 했지만, 사노 사장은 끝내 거부하면서 히요시산업도 우리 회사 때문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탱크에 대한 진단 의뢰를 하면 일본 선사가 선박을 매각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이고 그 정보를 가지고 그 회사가 새 선박을 건조할 때 자신들의 가입식 탱크를 쓰도록 미리 영업을 하게 하는 이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89년경에 우리 회사는 불황에서 완전히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히요시산업측은 일거리가 완전히 떨어져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어려움에 처한 히요시산업의 사노 사장을 돕기로 작정하고 일본의 조선소에 가압식 가스 탱커 1척을 발주하면서 히요시산업이 설계한 탱크를 쓰고 감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가스 탱커 시황이 바닥이라 조금 걱정은 됐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히요시산업의 일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선박을 건조하고 있는 사이에 선가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선박을 진수할 때쯤엔 유럽의 한 선주가 꼭 자신들에게 배를 팔아줄 것을 부탁해 우리는 이 배를 완공과 동시에 매각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얻은 선박 매각 차익이 무려 250만 달러나 됐다. 이러한 매각 대금은 우리가 1990년대 초반에 대형 가스선을 도입할 수 있는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히요시산업의 사노 사장과의 좋은 인연이 우리 회사 발전의 촉매제가 됐다는 점에서 나는 지금도 히요시산업과 사노사장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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