産銀 총재의 결단으로 초대형 가스선 도입

▲ 박종규 회장

우리 회사가 오늘과 같이 튼튼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불황 때 미래를 내다보고 대형 가스선 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스선 운항의 경험을 쌓게 해 준 고마운 선박이 초대형 가스선인 가스포임호이다. 우리는 이 배를 1988년 2월에 도입해 1995년 7월에 매각을 했는데, 이 배의 도입 과정에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이 선박은 다른 선박과는 달리 외국의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나라 산업은행의 자금으로 매입했다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당시는 해운산업 합리화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국내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한번 부딪혀 본다는 심정으로 아주 상세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산업은행을 찾아갔다. 그리고 김흥기 산업은행 총재를 만나서 “틀림없이 선가 상환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전제하고 사업계획을 설명하려했다. 그러자 김 총재는 브리핑을 하려는 나를 제지하고는 “선가의 20%를 자가 부담해야 하는데 어떻게 조달할 생각이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저희들이 일본에 외화로 돈을 좀 모아 놓았습니다. 그것을 들여와 착수금으로 쓰려고 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우리는 실제로 썬멀리온호를 매각하고 남은 200만 달러를 갖고 있었다. 김 총재는 이러한 나의 답변에 “해외에 숨겨놓은 개인 돈을 국내에 들여와서 회사에 넣겠다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기업인의 태도”라고 나를 치켜세운 다음, 그 자리에서 융자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김흥기 총재의 결단에 가스포임호를 무사히 들여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대형가스선들도 들여올 때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까지도 은행들은 해운업에 대한 대출을 죄었기 때문에 은행의 대출로 배를 산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불황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측 능력 키워라, 연구비 10만불 투자

하지만 불황 때 투자하는 전략을 우리는 항상 추구했다. 불황 때 선박을 싸게 도입하면 나중에는 큰 힘이 된다. 호황이 돼서 고가에 선박을 매각하면 재무구조가 튼튼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시황을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이다. 자칫 호황을 잘못 예측해 무리하게 선박을 도입했다가는 악성 부채에 시달리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는 나는 해운회사의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5년에서 10년 앞의 시황을 내다볼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해운경영자들이 해야 할 일의 전부요, 가장 중요한 골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선박을 가동해 해운수입을 올리는 일은 회사를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장에서는 시세보다 운임을 더 주는 화주도 없고 덜 받는 선주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운임 수입만으로는 회사를 유지할 수는 있을지언정 획기적인 성장을 구가할 수는 없다. 결국 정말 크게 성장하려면 선박을 언제 어떻게 매각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선박 매매 결정 하나가 그 선사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언제 선박을 도입하고 언제 매각을 하느냐 하는 결정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는 나는 이런데 대한 연구에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가스선 시장 진출을 꿈꾼 뒤 처음으로 확보한 신조대형선 가스로망호는 시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로 얻을 수 있었던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8년 내내 나는 전세계 대형 가스선과 화물 시황을 분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시장 보고서를 하나도 빠짐없이 수입해 읽고 분석했다. 가스선 시장의 동향과 선박 건조 현황 등 고급정보들이 들어 있는 보고서들이다. 어떤 것은 한권에 4만 8000달러나 하는 것도 있었다. 이런 시장 보고서를 구입하는데 한 해 동안 쓴 돈이 무려 10만 달러였다.

사내에서는 쓸데없는 자료에 너무 돈을 낭비한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나는 우리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생각에서 정보비를 아끼지 않았고 기획실 요원들을 독려해 보고서들을 철저히 분석했다. 나 스스로도 관련 연구자들과 토론을 하는 등 고시 공부하듯 열심히 시장분석에 매달렸다. 이렇게 몇 달을 고생 고생해 전세계 가스시장에 대한 최종 분석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보고서에는 여러 연구기관의 분석과 전망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체적으로 연구 분석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음은 물론이다.

고토사장, 모회사 승인없이 자금지원 결단

우리가 만든 최종 보고서의 결론은 우리가 원하는 사양인 대형가스선을 빨리 신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형가스선의 신조선가는 무려 6000만 달러에 달해 해외로부터의 자금 조달이 어려운 것이 문제였다.

1988년 12월 나는 최종보고서를 지참하고 일본 동경에 있는 도긴리스를 찾아가서 중역과 담당자에게 브리핑을 했다. 현재는 가스선 마켓이 불황이지만 2년 후에는 분명히 회복될 것이라는 것, 따라서 6000만 달러짜리 대형가스선을 빨리 신조하고 싶으니 신조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것이 나의 브리핑 요지였다. 빨리 대형가스선을 신조해야지만 2년후의 호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나의 설명을 들은 도긴리스측 간부들은 대체로 수긍하면서 우리 계획에도 호의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브리핑 마지막에 “장기 용선계약을 전제로 하는 금융지원은 사양하겠다”고 말해 버렸다. 당시의 낮은 운임으로 장기계약을 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비즈니스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선주도 확보되지 않아 불안한 상태에서 선박금융을 지원해달라는 것이었으니 도긴리스의 간부들은 매우 난처한 표정이었다. 시장 전망은 믿을 만하더라도, 신용만을 가지고 6000만 달러의 거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도긴리스측으로서도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도긴리스측은 “검토해보겠다”는 말만 했다. 일본말의 ‘검토해보겠다’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나는 일이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바로 서울로 돌아와 버렸다. 도긴리스 말고는 자금을 지원해 줄 데가 없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2개월여가 지난 1989년 2월초에서야 도긴리스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시 한번 구체적인 내용을 상의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도긴리스가 우리의 시장 분석 내용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화물 확보를 위한 장기계약 문제를 다시 쟁점화할 것이라는 예상을 가지고 일본 동경의 도긴리스를 다시 찾아갔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도긴리스측은 우리의 선박건조자금을 지원해 주는 대신 선박이 건조돼 인도되는 시점(1990년말) 6개월전에는 반드시 장기 용선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우리측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장기 용선계약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도긴리스측의 배려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나는 향후 1년 6개월정도가 지나면 시황이 회복되리라는 전망을 가지고 도긴리스측의 요청을 수락했다. 이렇게 두달 후인 1989년 4월 28일 홍콩에서 우리 회사는 미쓰비시조선, 도긴리스 등과 함께 계약 체결 기념식을 갖게 됐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