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주고 병주고, 유요해운과 묘한 인연

▲ 박종규 회장

가스미러클호에 대한 에피소드는 몇 개가 더 있다. 사실은 이 가스미러클호 건조에는 예의 유요해운이 관련이 돼 있었다. 미쓰비시측이 제시한 선가가 너무 비싼 것이 마음에 걸린 나는 유요해운측에 공동건조를 제안했고, 언제나처럼 유요해운이 여기에 응해, 두 회사가 공동건조에 들어가게 됐었다.

우리는 백방으로 용선주를 찾은 끝에 1992년 4월, 그리스의 나프토마라는 회사와 용선료 115만달러에 5년간 계약하기로 합의하고 유요해운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유요해운이 금융교섭을 하던 일본은행에서 나프토마사를 믿지 못하겠다며 용선료에 대한 은행 지급보증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이 계약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기분이 상한 나프토마가 가계약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계약이 취소된 이후 여름철이 되자 운임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불안을 느낀 유요해운은 그만 공동발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최악의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시황이 회복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뚝심으로 밀어붙인 끝에 유공가스(현 SK가스)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가스미러클호가 정말로 기적을 일으켰다고 혹자들은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기적이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가스미러클호의 성공도 사실은 기적이 아니라 정확한 시황 판단과 그것을 믿고 끝까지 적극적인 영업활동을 펼쳤던 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환리스크 관리로 건조자금 대폭 절약

선박을 건조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이 환율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달러가치가 상승할 때 선박을 잘못 발주하면 선가 상환에 애를 먹게 될 수도 있고, 엔화를 미리 사두었는데 선가를 지불할 시점에서 엔고 현상이 발생하게 되면 일본에서는 배를 싸게 짓게 되는 셈이다. 나는 이러한 환율관리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아 대형 가스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90년대 초반부터 환 리스크 관리에 엄청난 신경을 썼고, 그 결과 선가를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환율 관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90년에 초대형 가스운반선 가스로망호를 신조 발주할 때부터이다. 선가 74억엔에 미쓰비시중공업에 발주된 이 선박은 결제 통화가 엔화였다. 따라서 엔화가 약세일 때 미리 사두는 것이 필요했다. 면밀한 검토를 거쳐 선물로 엔화를 미리 매입하기로 결심을 하고, 환율 변동을 주시한 끝에 엔화가 1달러에 148엔 할 때 5000만 달러어치의 엔화를 매입했다.

우리가 조선소 측에 마지막 선가를 지불할 때는 1달러에 130엔 했으므로 1달러당 18엔의 차익을 남길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달러로 하면 약 700만달러를 절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700만달러짜리 배를 5000만달러에 산 셈이 된 것이다. 두 번째 대형가스선인 가스미러클호도 같은 방법으로 해서 선박 건조비용을 300만달러 아낄 수가 있었다.

환율 리스크 관리에 가장 성공했던 것은 1997년 12월 우리나라가 IMF 관리하에 들어가게 됐을 때이다. 당시에 우리는 일본 동경에 해외 투자금 중에 회수한 480만달러를 선박 건조를 위해 묻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국가가 외환위기로 휘청대고 있는 상황이라서 선박건조를 미루더라도 외화를 국내로 들여오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우리의 외화 반입은 국민들이 금모으기 운동까지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외환위기 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마음에서 단행이 됐다. 운임 수입 20만불을 보태 500만달러를 국내로 들여왔던 것이다. 당시에 환율은 1달러에 1000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당선자가 기자회견에서 “내가 정부를 인수받으려고 보고를 받아 보니 나라가 오늘 망할지 내일 망할지 모르는 위기 상황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나는 ‘내일이면 환율이 급상승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다음날 환율은 급등해 1달러당 1980원까지 치고 올라가 모두를 경악케 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매각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즉각 달러를 매각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더 오를 것 같다는 은행의 말을 믿고 팔기를 주저했지만, 내가 화까지 내면서 재차 강력하게 지시해 마침내 1955원에 500만달러를 매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달러를 매도하자마자 환율은 꺾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 우리는 수십억원의 환차익을 누릴 수가 있게 됐다.

이런 것을 환 투기라고 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국가를 생각하는 우국충정에서 달러를 들여온데 대한 일종의 보상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설사 달러를 들여와서 손해를 봤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조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했을 것이다.

앞으로 세계경제의 통합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진전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들은 일상적인 영업활동 펼치는 것 외에도 환 리스크의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러나 환율 예측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기에 기업들은 환차익을 보겠다는 생각 보다는 환차손을 최대한 방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환리스크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 경영자들은 환리스크를 최대한 방지하겠다는 경영마인드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전공분야 LNG선 운영선사가 못된 서운함

1990년대에는 해운환경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자본시장의 개방 압력이 거세지면서 환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이 부각이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또 하나의 변화는 환경 관리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각국이 기존의 화석 연료의 대체 연료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됐고, 그에 따라 친환경 연료인 LNG 수요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LNG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정부는 1990년 3월, 천연액화가스 즉 LNG를 수입할 때 우리 국적선사가 우리의 국적선으로 수송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까지 LNG를 수입할 때는 외국선사의 선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이러한 계획에 따라 LNG선을 실제로 운항할 국적선사를 선정하게 됐는데, 현대상선이 제1호 LNG선의 운항선사로 확정되는 등 SK해운, 한진해운, 대한해운 등이 차례로 LNG선을 신조해 운항할 수 있는 운영선사(출자 컨소시엄을 대표해 선박을 운항하는 선사)에 선정됐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 회사(한국특수선)는 국적 LNG선을 운항할 수 있는 기술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영선사에 뽑히지를 못했다. 그 이유는 우리 회사가 규모가 작은 중소선사라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석유화학 제품이나 가스 운송에 독보적인 노하우와 운항기술을 가지고 있는 우리 회사가 운영선사에 선정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단지 규모가 작다는 그 이유 하나만 가지고 운항할 수 있는 운영선사가 못되고, LNG선에 소주주로서 지분 참여만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한편으론 억울한 심정이었다.

우리 회사가 LNG선 건조와 운항에 참여한 지분은 1호선(94년) 3.68%, 2호선 6.46%(94년), 3호선에 9.8%(95년), 4호선에 5.96%(96년)였다. 투자금액으로 따지면 합계 6641만달러로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운영선사는 못 됐지만 중소형선사 가운데는 유일하게 지분 참여를 한 것이니까 그것으로서 위안을 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석유화학 관련 위험물을 전문 수송하는 그야말로 ‘특수선 전문 회사’였는데, 전공분야에서 주체적인 운영선사를 해보지도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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