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사업 접근위한 남북직항로 개설

▲ 박종규 회장

1990년대 초반부터 나는 한쪽으로는 남북 직항로 개설에 몰두하게 됐다. 내가 남북을 연결해 중국 길림성으로 컨테이너화물을 수송하는 컨테이너 운송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냉동선 운항회사인 일우해운을 인수했다가 큰 낭패를 당한 일을 반추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수요공급만을 놓고 봤을 때는 분명 성공할 것 같았던 냉동선 운항 사업이 냉동 컨테이너의 출현이라는 시대의 조류를 읽어내지 못하는 바람에 완전히 망하게 됐던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이 때 나는 ‘컨테이너사업이야 말로 해운의 본류이고 케미컬 운송사업은 아류라 할 수 있는데, 적어도 본류의 변화 정도는 아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컨테이너 운송사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남북 직항로 사업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내가 중국의 조선족 선원들을 우리 국적선박에 승선시키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부터다. 당시 나는 한국선주협회의 해무담당 부위원장으로서 조선족 선원들을 국적선사에 승선시키기 위한 사업을 위임받아 중국의 길림성을 방문해 동포사업가 ‘전용만 회장’을 자주 만났다.

전용만 회장과 연길시에 선원학교를 설립하고 선원들을 교육시켜 국적선사에 취업시키는 선원교육과 선원송출 업무를 함께 하면서 상호간에 신뢰를 구축하게 됐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나는 전용만 회장에게 남북한에 직항로를 개설하고 북한에서 내륙운송으로 중국 동북지방까지 연결하는 컨테이너운송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 사업을 검토하기 시작한 1993년경에는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한국 중소기업들의 투자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길림성 등 동북3성과의 물류체계는 그야말로 너무나 열악해 중국의 동북3성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물류비용이 너무나 많이 드는 실정이었다.

컨테이너화물을 부산에서 연길시까지 들여온다고 할 때 부산에서 대련까지 해상구간 1020km를 선박으로 수송하고, 대련에서 연길까지 1300km는 다시 철도로 수송해야 하니 그 비용과 시간은 엄청나게 들어가야만 했다. 만약에 부산에서 출발한 컨테이너를 북한의 청진항이나 나진항을 경유해 북한에서 중국 연길시까지 내륙운송을 할 수만 있다면, 수송거리는 크게 단축이 되고, 그에 따라 물류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대실패로 끝난 남북직항로 첫 시험 운항

우리의 이러한 사업 구상을 가지고 전용만 회장이 북한측의 의사를 타진할 결과 북한측도 반응이 호의적이어서 사업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우리는 처음에는 부산과 청진항을 뱃길로 연결하고 청진에서 연길까지는 철도를 이용해 컨테이너화물을 수송하기로 계획하고 나는 관련 기관인 해운항만청, 통일부, 안기부 등에 사업허가 신청을 했다.

하지만 정부 관련부처 간 회의에서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정부로서는 북한에 처음으로 우리 선박을 보내는 일이었으므로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업계획에 의거해 컨테이너선을 용선해 부산항에서 출항 준비를 마치고 있는 우리 회사로서는 가만히 있어도 계속 용선료가 나가는 상황이라서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는 나는 일단은 시험운항으로 빈 컨테이너만이라도 수송하기로 하고, 해운항만청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컨테이너선을 부산항에서 출항시켜 청진에 기항하도록 조치했다.

물론 우리가 정부의 허가도 없이 출항해 청진항에 컨테이너선을 기항시킨 것은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3년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 질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건은 후에 남북 교류협력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처벌은 면했지만,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때로는 법을 뛰어넘는 소신 있는 행동이 역사를 만들어간다고 믿고 있다.

이 남북 직항로 컨테이너운송 시험은 전작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북한의 철도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아서 북한을 통과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철도운송 관리시스템도 행정구역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기관차로 바꾸어야 하고, 일일이 검사증도 수령해야 했기 때문에 기차가 달리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이러다 보니 최초로 컨테이너가 연길에 도착한 것은 부산을 떠난 지 2주일 후였으며 마지막 컨테이너가 도착한 것은 출항 후 51일만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기존의 대련항을 경유하는 루트보다도 2배나 더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서 절대로 이용이 불가능했다.

북한쪽도 이런 사실에 대해 매우 미안해하면서 청진항 대신에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내에 있는 나진항을 이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진항을 이용할 경우 중국과 국경이 더 가깝기 때문에 수송시간을 훨씬 더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들은 북한측의 요구를 수용하고 북한측과 구체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정부당국 승인 문제로 결렬된 항로개설 회담

남북한간에 남북직항로을 위한 회담은 1994년 5월말 중국 북경에서 열렸다. 나와 중국 연변항운공사 전용만 회장(동사장)이 사업추진자 자격으로 참석했고, 북측에서는 임태덕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회담 참석자들은 남북직항로가 갖는 경제성이나 그 의의 등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고 찬성했기 때문에 처음에 회담은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다. 특히 북한은 나진·선봉지구를 키워보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하지만 맨 처음 시비가 일어난 문제는 취항선박의 국적 표기 문제였다. 우리측은 취항선박의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표기하자고 했고, 북한측은 이 문제는 평양측과 협의를 거쳐야 하므로 휴회를 하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휴회를 하는 동안 호텔로 돌아와서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니 북한이 영변의 핵연료봉 교체를 강행하려하자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이 됐고, 회의석상에서 미국측이 북한을 폭격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가 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벌어지자, 통일부로부터 “회담을 중단하고 철수하는 게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북한측도 결국은 회담을 결렬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다시 재개된 회담에서 우리측 요구인 계약서에 ‘대한민국 선박’이라는 표현을 넣는 것에 동의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나는 북측에 대한민국의 깃발을 단 배가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로 남북간에 불편한 관계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북직항로 사업은 순풍을 만난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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