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유지해온 항로

▲ 박종규 회장

남북을 오가는 정기항로가 개설된 것은 해운역사에 남을 큰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마침 당시 북경에서는 남북한간에 쌀 회담이 성사가 됐기 때문에 남북한간의 직항로 개설은 주목을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또 하나는 남북한 당국이 이런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기를 꺼려하는 일면이 있었기 때문에 홍보를 전혀 하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다.

우리 정부당국은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남북한 직항로 개설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홍보하지 말 것과 부산항에서의 취항식도 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요구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길림성과 연길의 언론들이 남북 직항로 개설을 대서특필하고, 이를 성사시킨 전용만 회장을 ‘동북아의 해운왕’이라고 치켜세우는 보도를 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다.

남북한간의 직항로는 남북한간에 해운협정이 없기 때문에 운영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해운협정이 없는 상태에서 정기항로를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하든 민간기업이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남북 관계 개선에 밑거름이 되겠다는 헌신적인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어가기가 힘든 사업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당장의 수익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투자해야 하는 사업이었다.

사실 이런 사업은 우리의 고객과 국가에 봉사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특히 항로의 안전성이 전혀 담보돼 있지 않은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더구나 육로는 엉망이고 철도는 낡아서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트럭 운전수들이 나진에서 연길까지 컨테이너를 운반하는데 엄청난 고생을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어려운 항로를 그래도 오랜 기간 끌어왔다는 것이 꿈만 같다.

일본 니가타까지 연결 삼각항로 완성
                                   
남북간 직항로는 이후에 일본 니가타까지 연결하는 삼각항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99년 8월 동룡해운은 부산-니가타-나진을 연결하는 이른바 삼각항로를 개척했다. 이 삼각항로는 우연히 얻어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사실 부산-나진항로를 시작할 때부터 마음속으로 한국-북한-일본을 연결하는 환동해권 정기항로를 개설을 꿈꾸고 있었다.

이 당시 나는 매년 1월 일본 니가타에서 열리는 동북아시아경제회의에 빼놓지 않고 참가했다. 이 회의에는 북한의 나진·선봉 자유경제지대 책임자들이 참가하는데, 이들을 만나 부산-나진간 정기항로에 대한 업무 협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목적은 니가타의 상공인들을 만나 부산-니가타-나진 삼각항로 개설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일이었다. 당시 니가타의 상공인들은 부산-나진항로간 항로가 잘 돼가고 있다는 것을 매우 부러워했으며, 북방 대륙과 니가타항을 연결하는 정기선항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러 번 내비쳤다.

니가타 상공인들이 나에게 니가타항에 기항해 달라는 말을 직접 한 것은 98년 5월에 일본 돗토리(鳥取)현 요나고(米子)시에서 열린 동북아경제포럼에서였다. 이 포럼에 참석한 니가타 상공인 몇 사람이 부산과 나진만을 왔다 갔다 할 것이 아니라 니가타항에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지 않아도 니가타항 기항을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에게 일본 정부를 통해 우리 정부에 요청을 하면 니가타항 기항이 가능할 수 있으니, 우리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청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로부터 2달이 지난 98년 7월에 니가타현의 지사로부터 우리 해양수산부로 니가타항 기항을 요청하는 공문이 보내져왔다. 당시 김선길 해양수산부 장관은 나를 불러 항로 개설 의지를 확인한 다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김선길 장관은 처음에는 니가타-나진간 항로에 화물이 많지 않으므로 사업적으로는 손해를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해 니가타현의 요청을 수락하기를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당장에 손해는 보겠지만 먼 장래를 내다보고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동해를 일본은 ‘일본해’라고 부르며 자기 앞마당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참에 동해를 우리의 마당으로 굳혀야 합니다. 개인 기업의 손익 문제를 떠나 환동해권 해운정책의  일환으로 쾌히 승낙해야 한다고 봅니다”라고 말해 김 장관의 수락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리해 니가타항 기항과 부산-니가타-나진간 3각항로 개설은 확정됐고, 니가타항 기항은 99년 4월부터 한다는 내부 방침을 확정했다. 또한 니가타항로 개설에 대한 최종적인 발표는 99년 2월 8일 니가타에서 열리는 동북아시아경제회의 석상에서 하는 것으로 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98년 8월에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일본 열도 너머로 쏘아 올린 것이다. 이 바람에 일본의 우익단체들은 북한의 원산과 니가타간에 취항하고 있는 북한의 만경봉호의 입항을 거절하라고 니가타현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동경의 우익단체 회원들이 버스 몇 대를 동원해 니가타까지 와서 니가타현청과 만경봉호가 입항하는 부두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더구나 12월초에는 우익단체 청년 한사람이 니가타 히라야마 지사의 얼굴을 칼로 긋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상황이 험악했기 때문에 우리의 니가타항 기항은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니가타현과 협의해 니가타항로 개설 시기를 4개월 미루기로 했다. 그리해 99년 6월 4일 니가타 상공인 15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연사로 나서 니가타항로 개설을 정식으로 발표했고, 당초 계획보다 4개월 늦은 99년 8월 20일에 니가타항을 연결하는 삼각항로 서비스를 개시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개설한 남북 직항로와 부산-니가타-나진의 3각항로가 남북한 간의 긴장 고조로 인해 중단돼 현재 전혀 운영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새 시대를 맞이해 남북한 간의 긴장 완화와 교류협력에 물꼬가 트였으므로, 다시 남북한간 컨테이너 직항로가 재개되기를 희망해 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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