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업원지주제 정착위해 상장에 나서다

▲ 박종규 회장

우리 회사는 90년대 초반부터 증권거래소 상장을 목표로 끈질기게 도전했으나 2000년대 중반까지는 그 꿈을 실현 시킬 수가 없었다. 2007년 10월에 비로소 ㈜KSS해운의 이름으로 상장이 돼 오늘날 상장된 해운회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지만, 상장되기 이전의 과정은 정말 눈물겨운 시련의 연속이었다.

1991년 당시에 우리 회사는 1987년부터 5년간 연속 흑자를 기록해 순조로운 성장을 하고 있었다. 증권감독원이나 재무부가 상장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3년 연속 흑자’라는 기준은 이미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상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상장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더구나 당시에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3저시대’였기 때문에 증권시장 역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고, 그에 따라 증시 상장을 노리는 회사들도 많았다.

나는 우리 회사가 아주 건전한 재무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상장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사원들에게 주식을 매입할 것을 권장했다. 당시에 내가 보유한 주식 비율은 20%였는데, 사원들이 이 기회에 주식을 대량 매입한다면 종업원 주식 보유비율이 높아져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종업원지주제가 정착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자금이 부족한 직원들에게는 퇴직금을 중간정산 하는 방식으로 매입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해줬다.

그러나 이미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우리 회사의 상장은 91년 12월말 하루아침에 좌절되고 말았다. 증권감독원을 관장하는 정부 관련부처에서 “해운회사는 증권거래소 상장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증권감독원에 내려 보낸 것이다. 증권감독원장은 나를 불러 “최종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해운회사는 상장할 수 없다는 방침을 확인했다”며 나에게 양보를 좀 해달라고 말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한심한 일이었다.

정부가 이러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은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가 아직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80년대 중반, 정부는 죽어가는 해운업을 살리기 위해 선사들간에 통폐합을 해 선사 수를 줄이는 소위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런데 91년말까지도 해운산업합리화 조치로 인해 해운업계가 걸머진 부채들이 상환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이므로 해운회사들은 상장을 시킬 수 없다는 논리였다. KSS해운의 재무상태 등을 살펴보고 내린 ‘불가 결정’이 아니라, 해운산업 전체를 대상으로 내린 ‘상장 불가 결정’이니 말도 안 되는 부당한 결정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해운회사이니까 상장을 불허한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연말 증시가 약세화 될 것을 우려한 정부당국이 증시에 추가 진입을 봉쇄함으로써 주가가 하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인위적인 조치였음은 나중에 알게 됐다. 재수가 없었던 측면도 있다. 연말 폐장일 오전에 주가가 상승하면 상장을 허락하고, 하락하면 상장을 불허하겠다는 방침이었는데, 오전 장에 주가는 떨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한해를 뒤로 미뤄 92년에도 상장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우해운’을 인수하면서 시작한 바나나운송 사업이 크게 실패함으로써 53억원에 가까운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고, 상장은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상장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게 된 해도 있었다. 97년에서 99년까지 3년간 연속적으로 흑자를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채비율이 문제였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회사는 LNG선 사업에 1호선에서 4호선까지에 총 6600만달러를 투자했다. 이런 거액의 자금을 연불로 들여왔으므로 부채비율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운업체의 특성을 무시한 채 부채비율을 문제 삼아서 상장을 해주지 않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자본집약적인 해운업의 특성을 무시한 채 부채비율이 낮아야만 상장을 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과연 상장을 할 수 있는 선사는 얼마나 되겠는가?

내가 이렇게 어려운 난관 속에서도 상장을 꼭 하고자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종업원지주제를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종업원들이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의 주식을 가지려면 목돈도 필요하고, 투자유인도 있어야 한다. 투자유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회사 주식이 증시에 상장돼 있는 것이 훨씬 더 종업원들의 투자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商人은 절대로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

이쯤에서 우리 회사와 관련된 얘기는 접고, 내가 관여했던 단체들에 얽혔던 얘기를 정리했으면 한다. 우선은 외항선사들이 모인 단체인 한국선주협회와 관련된 내용이다.

한국선주협회와 나와의 인연은 앞서 남북직항로 개설과 관련한 설명에서 얘기했듯이 내가 한국선주협회 해무분과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조선족 동포 선원들을 우리나라 국적선에 태우는(송출하는) 업무를 총괄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나와 중국의 사업가 전용만 회장은 길림성 연길시에 조선족 동포 선원 양성 학교를 설립해 졸업생들을 주로 한국 국적선사에 승선시키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이 사업은 독점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당시에 선박에 승선할 하급선원이 절대로 부족한 한국 국적선사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그래서 사업은 오랫동안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선주협회와 관련된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인지, ‘한국선주협회 회장 후보’로 거론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선주협회 회장 자리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것들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이를 바로잡고 싶다.

1991년 연말쯤으로 기억되는데,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이 나를 불러서 한국선주협회 회장직을 맡아 줄 것을 주문했다.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차기 한국선주협회 회장 후보로 추천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그 자리에서 선주협회 회장직을 맡을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맹기 회장은 많은 사람들이 추천했다는 것을 내세워 회장 후보로 나서줄 것을 권유했지만 나는 끝까지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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