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본차이나와 세계 일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학생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책걸상, 책장, 침대, 옷장이 있는 침실 4개가 있었다. 거기에 거실, 부엌, 화장실을 겸한 샤워실은 네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했다. 이를 셀이라 한다. 한 셀에 남자 세 명과 애틴 여자대학생 한 명이었다. 신성한 학생기숙사에 남녀가 합숙하다니! 남녀 7세 부동석이란 고정관념에 절어있는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노르웨이 문호 입센이 『인형의 집』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을 부르짖었던 남녀평등의 나라임을 알고는 내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손수 밥을 해 먹어야 했다. 해본 적이 없어 난감했다. 기숙사 주위에 음식점이 없었다. 음식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노르웨이 정부가 주는 생활비로는 밥을 사 먹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답답한 자가 샘 판다고 하는 수 없이 식기를 구입했다. 냄비, 국그릇, 물컵, 포크, 나이프 등등.

접시 두 개도 샀다. 접시가 상큼한 고급제품은 아니지만 순박한 아주머니를 닮아 정감이 갔다. 주황색 바탕에 초콜릿 빛 줄무늬 두 줄이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다. 밥, 샐러드, 과일을 담고 스테이크도 칼질할 수 있는 다용도였다.

중국 도자기가 유럽으로 건너간 18세기 이후, 영국은 본차이나(Bone China)를 만들었다. 소뼈와 화강암 가루를 고령토와 배합해 견고하고 가볍고 맑은 빛의 반투명체다. 본차이나가 출현하고서 영국이 도자기의 종주국이 됐다. 본차이나가 영국의 홍차 문화와 산업혁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접시 2개가 영국 본차이나임을 알고서 내가 아끼는 애장품이 됐다.

유학 기간이 끝났다. 외국에 나가기가 어려웠던 시대라서 이왕 외국에 나온 김에 노르웨이 정부가 주는 오슬로-서울 항공료에다 추가 항공료를 부담해 세계 일주 여행을 계획했다. 우선 미국 입국 비자를 받아야만 했다. 주노르웨이 미국대사관엘 갔다. 영사가 단방에 남자의 기를 꺾어놓을 듯한 미국 특유의 여성이었다. 30대 미모에 매력이 넘쳤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미국엔 왜 가려고?”, “해운과 항만을 둘러보려고”, “돈은?”, “노르웨이 정부가 주는 생활비를 절약해서”, “얼만데?”, “예금통장 보여줄까?”, “필요 없어.” 그리곤 “미국에 불법체류자가 많은데 멕시코 다음으로 어느 나라인 줄 알아?”, “몰라”, “한국이야”, “그건 나와 상관없어” 유신 정국으로 망명자가 많을 때였다. 가시 돋친 인터뷰가 끝나 여권에 비자스탬프가 찍혔다.

책과 소지품을 챙겨 짐을 쌌다. 식기류는 접시 두 개만 깨지지 않도록 내의로 싸서 한가운데 넣어둔 트렁크를 들고 기숙사를 나왔다. 오슬로대학 법학과 여학생에게 떠난다는 쪽지를 남겨두고서. 밤새워 책과 씨름하던 추억이 서린 기숙사를 떠나는 내 마음이 정든 임 두고 떠난 어느 장부의 심정도 이러했을까!

아직도 스키가 한창인 1976년 2월 26일 오슬로 공항을 이륙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니 봄이 기다리고 있었다. 들판에 활짝 핀 튤립꽃들이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독일로 이동하여 함부르크항만을 견학했다. 터미널들을 해저터널로 연결하는 정교한 항만토목공사 기술이 놀라웠다.

프랑스 파리에서 소르본대학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트르담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센 강변을 걷다가 루브르박물관에 들러 주마간산으로 관람하고는 베르사유궁을 관광했다. 프랑스 문화예술에 고개를 숙였다.

스페인 프랑코 총통의 사망으로 경계가 삼엄한 마드리드 공항을 거쳐 라스팔마스로 갔다. 유럽에서 묻은 때를 대서양 바닷물에 씻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콩코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웅대한 뉴욕을 보고는 기가 질렸다.

북미대륙을 횡단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무리한 여행에다 시차에 시달려 내 꼴이 말이 아니었던지 처외삼촌이 여권과 항공권을 압수했다. 먹고 자고를 반복하여 피로를 풀고는 도교로 왔다. 도쿄 시내 관광을 하고 요코하마항만을 시찰했다. 사람과 도시환경이 한국과 엇비슷해 이웃 동네에 온 기분이었다.

1976년 3월 20일, 좋든 싫든 내 조국 대한민국 서울로 되돌아왔다. 본차이나와 함께한 세계 일주 여행이었다. 그 후 43년을 내 보물로 애장했다.

내 83회 생일에 ‘첫 손녀답게 동생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할게요. 미국에 가면 다슬, 다해, 다함을 잘 챙기고 보살필게요. 언니로서 멋진 모습 보여주고 할아버지 말씀대로 우리 집안이 명가가 되도록 할 거에요. 예일에서 더욱 더 열심히 해서 훨씬 발전된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란 첫째 외손녀가 생일축하편지를 낭독했다. 편지내용과 낭랑한 목소리에 나는 감동했다.

그는 친손녀와 외손녀 다섯 중 첫째다. 예일대 대학원 첼로전공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나처럼 학생기숙사에서 손수 밥을 해 먹을 것이다. 사촌 동생들까지 챙기려는 따뜻하고 책임감 있는 첫째 외손녀에게 내 보물 본차이나를 주련다. 이 할비를 생각하며 밥을 지어 먹다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결혼해 내 증손녀를 낳으면 증손녀에게 본차이나를 넘겨주길 바란다.

그때, 본차이나는 4대를 이어온 내 집안의 골동품 가보家寶가 되리라.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