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부정 없는 투명한 경영 당연시 돼야

▲ 박종규 회장

다섯 번 째로 우리 회사에는 비밀 장부가 없고, 회계장부 조작도 없다. 과거에는 회사들마다 적자가 나는 것을 감추거나 세금을 조금 낼 목적으로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일들이 꽤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회사도 1994년도 결산까지는 예외라고 할 수가 없다. 이익이 난 것을 적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적자가 났을 경우는 은행이 무서워서 조금 이익이 난 것으로 분식하는 일도 있었다. 은행 담당자들이 대출 심사가 어렵다며 오히려 흑자가 난 것으로 만들어 오라는 요구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1995년 이후에는 흑자가 나든 적자가 나든 사실 그대로를 정리해 발표하고 있다.

1995년 이후에 투명한 경영을 하게 된 것은 그 해에 내가 사장을 그만두고 바른경제동인회 일에 전념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바른경제동인회를 하는 마당에 잘 못된 회계관행을 내 후임 경영자에게 물려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회사의 경영상태가 좋지를 않아서 적자가 나더라도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만 않는다면 장부를 조작할 이유가 없다. 우리 회사는 1995년에 이어 1996년에도 적자가 났지만, 그대로 발표했고, 은행 돈을 빌리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속에서도 2년을 버텨냈더니 1997년부터는 흑자가 나기 시작했다. 그 이후 98년, 99년 연속 흑자가 나면서 부채는 늘어나지 않고 현금 유동성이 아주 좋아졌다. 그리고 재무제표는 물론 적자가 나기 그 이전보다도 더 좋아졌다.

나는 1998년부터는 투명한 결산 관행이 정착됐다고 판단하고 회사 규정을 고쳐 실무자와 공인회계사에게 결산을 맡겨버렸다. 원칙대로 실무자가 처리한다면 분식을 하지 않는 한 사장이나 중역이 회계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사규에 회계실무자에게 아예 전결권을 주도록 정해놓은 것이다. 결국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고 리베이트를 주지 않는다는 우리 회사의 전통이 회사의 회계처리와 결산 방식까지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런 변화는 내가 경영일선에 물러나 단지 주주로만 머물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경영에서 손을 떼고 보니 나는 그저 한사람의 주주에 불과했다. 내가 경영을 할 때는 회사 경영 내용을 훤히 알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었지만, 주주 입장이 되고 보니 믿을만한 것은 결산서 밖에 없었다. 임직원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할 근거는 결산서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결산서가 분식돼 기업의 실제 경영 내용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면 큰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또한 당시에는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반 주주 입장에 서게 된 나로서는 분식이 없는, 보다 투명한 회계 보고서가 작성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려면 기업이 회계부정이나 회계 조작 등이 없는 투명한 경영을 해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종업원지주제’야말로 나의 이상이자 꿈

나는 사업이 순탄할 때 일수록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사업이 확장될 때는 갖은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창립 때의 초심을 잃지 말자’는 다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동해조선의 큰 실패 이후에도 갖가지 실패를 할 때마다 ‘지금의 실패를 결코 잊지 말자’고 뼈에 사무친 결심을 했기 때문에 방만한 경영을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창립된 지 5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창립 당시의 각오는 잊지 않고 있다.

△ 남이 안하는 부분을 개척한다 △ 군살없는 조직을 유지한다 △ 일체의 뒷거래를 배격하고 최고의 도덕성을 성취한다 △ 밀수 없는 선원 사회를 만든다 △ 종업원지주제를 실천한다 △ 족별경영을 배격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한다. 이 여섯 가지가 창립 당시의 우리의 각오였다.

나의 기업관은 또한 분명하다. △ 기업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公器)이다 △ 재산은 상속할 수도 있지만 경영권은 상속해서는 안 된다는 두가지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기업관은 앞서 밝힌 것처럼 나의 이력과 관련이 있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첫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에서 선원노조에 참여했고, 1968년 정부가 대한해운공사를 민영화 하려고 했을 때 이 방침에 반대해 해운공사에서 우리사주조합운동을 벌인 것도 바로 나였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나는 1969년 회사를 창업했을 때부터 종업원이 회사의 주인으로 참여할 수 있는 종업원지주제를 추진해 왔다. 이같은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유한양행에 이어 두 번째로 추진됐다는 점에서 우리는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 회사가 완전한 종업원지주제를 이룩한 것은 아니었다. 1998년말 나의 지분은 40%가 넘었다. 당시로서는 상장이 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주식을 가지고 있던 직원이 퇴사를 하게 되면 대주주인 내가 그 주식을 매입해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다 보니 종업원들의 주식 지분은 오히려 줄어들게 됐던 것이다.

1999년 들어서 나는 내 보유 지분 중에 회사 전체 주식의 10%에 해당하는 지분을 우리사주조합의 기금으로 내놓았다. 이를 계기로 종업원 지분이 계속 늘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상장이 됐을 때 사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주식을 매입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종업원지주제 운동은 날개를 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보다도 대한해운공사 시절 한번 실패했던 종업원지주제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보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종업원지주제’는 말하자면 나의 이상이었고 포기할 수 없는 나의 꿈 자체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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