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이별의 노래

여름방학을 맞아 손녀 둘이 온다.

중간에 한 번 잠깐 다녀가기는 했지만, 그 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얼마나 성숙했을까? 그리고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까? 먹고 싶은 음식을, 갖고 싶은 물건을 무엇이든지 사주면서 즐거워하는 표정을 읽고 싶다.

그보다도 이 할비가 그들의 빈공간을 채워주어야겠다. 첫째 손녀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4개월을 다니다가, 둘째 손녀는 첫돌을 갓 지나고서 부모 따라 미국으로 떠났다. 12년이 지났다.

9월이면 첫째는 대학 2학년, 둘째는 중3이 된다. 얼굴만 한국 사람이지 생각과 행동은 미국화됐다.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한국을 심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한국에 온 김에 보고 듣는 체험으로 한국을 마음에 담아 줄 방법을 곰곰이 궁리했다.

첫째로, 국립중앙박물관 관람이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 한국역사를 대면할 수 있다. 표지판에 영어 설명이 있으니 얼마든지 주워 담을 수 있다. 거기에서 이틀만 먹거리 사 먹이며 이것저것 둘러보게 하면 한국을 개략적으로 이해하리라 믿었다.

둘째로, 고궁 탐방이다. 경복궁을 둘러보고 나와 광활한 광화문 거리를 거닐다가 덕수궁에 들여 조선 왕조의 비극과 대한민국의 찬란한 역사를 감각적으로 느끼면 한국 사람이란 자긍심을 느끼리라.

셋째로, 도라산역 방문이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한국의 산야를 바라보고 도라산역에서 북녘땅과 하늘을 바라보며 민족분단의 비극을 느낄 것이다.

넷째로, 문화원의 전통예절교육이다. 조카와 상의를 했더니 약식으로 한나절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이러한 나의 거룩한(?) 계획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손녀 둘을 빼앗겼다. 외가댁, 고모댁, 그리고 친지 따라 속초와 제주도로 돌아다니느라 4주를 거의 보냈다. 나와는 겨우 4박 5일이었다. 더욱이 폭염 주의보와 경보가 연일 발령되니 노인의 체력으로 감당키 어려웠다.

겨우 마지막 날 손녀 둘과 아내와 나, 넷이서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하느님! 이들을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보호해주소서. 정글과 같은 낯선 미국에서 바르게 자라 조국과 국제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해주소서!”라고 간곡하게 기도를 올렸다.

몸집도 어른이 되었고 속도 꽉 찼다. 그러나 이 할비에겐 어리광을 부리는 철없는 아기들이다. 나는 귀여워 쓰다듬어주고, 그들은 나에게 찰싹 안긴다. 귀엽다. 언제까지나 내 옆에 두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내일 새벽 5시면 인천공항으로 가야 하는 마지막 이별의 밤이었다. 내 앨범들과 저서들과 행적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들의 기억 속에 이 할비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겨주기 위한 절박한 생각에서다.

짐을 싸면서 중간 중간에 노래를 가르쳤다. 간단한 한국노래를 한 두 곡만이라도 부를 수 있다면 한국 정서가 살아있고 스스로가 한국인임을 느낄 것 같아서였다.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의 <이별의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는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그리고 우리의 민요 <아리랑>도 가르쳤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간단 간단해서 곧잘 따라 불렀다. 가사를 적어주며 파티 때 한국인임을 밝히고 당당하게 부르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인천공항이다. 첫째 손녀가 나를 꼭 껴안고는 “할아버지 내 졸업식에 꼭 와야 해”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둘째 손녀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해. 고등학교 졸업하고 올게”라며 흐느꼈다.

출국장을 들어가며 계속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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