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공유제’는 직원들에게도 배당금 주자는 것

▲ 박종규 회장

잘 알려진 바처럼 우리 회사는 종업원지주제를 넘어서 ‘성과공유제’를 실천해 가고 있다. 성과공유제란 이익이 날 경우 종업원들에게도 똑같이 배당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듯이 종업원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회사 주식을 갖고 있는 직원이라면 주주로서도 배당을 받고 종업원으로서도 이익이 난 부분에 대해서 얼마간을 또 받아가게 되니 큰 이익이 아닐 수 없다. 종업원들에게 주는 것도 배당금이라고 부르고 이익이 나는 정도에 따라 얼마를 준다는 것은 아예 표로 만들어 놓았다.

성과공유제는 투명한 회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비자금을 만들거나 회계 부정을 하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만약에 어떤 중역이 이익이 나는 부분에서 비자금을 조성하려고 한다면 직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자기들이 가져가야 할 부분이 비자금 조성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아무리 위에서 지시를 해도 비자금은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익을 더 많이 내기 위해 서로 노력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는 실제로 비자금을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시스템이 돼 버린 것이다.

성과공유제의 숨은 역할은 역시 잘 못된 관행인 리베이트를 없애는 데 있다. 비자금을 만들려면 현금을 뽑아 써야 하는데 그럴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결산서 상에 이익이 줄어들면 종업원들이 가져가는 배당금도 줄어드니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러니 종업원들은 이익이 많이 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니 매년 이익이 많이 늘어나는 것이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우리 회사는 2015년에 200억원의 흑자를 낸 이후에 계속해 200억원 이상의 흑자를 내고 있다.

그런데 이 ‘성과공유제’가 과거에 ‘이익공유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보니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한 때 모 정치인이 ‘초과이익공유제’라는 말을 썼는데, 이 제도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운동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고, 그래서 확산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성과공유제도 비슷한 것으로 착각해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들먹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해를 잘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과공유제를 설명하면서 “임원들에게 주는 스톡옵션을 종업원들에게도 주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익이 나면 임원들만 줄 것이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줘야 한다. 큰 머슴은 주고, 작은 머슴은 안준다면 이것은 안 될 말이다. 성과를 종업원들에게도 나누어 주면, 사원들 전체가 주인의식이 생기게 되고 회사는 잘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경영에서 물러나 바른경제동인회에 전념

내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1995년 3월이다. 회사가 안정궤도에 올라섰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체제로 가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은 또한 ‘경영세습은 있을 수 없다’는 나의 지론을 그대로 실천하는 길이기도 했다.

일선에서 물러나서 주력했던 것이 바로 정도 경영을 실현하기 위한 기업인의 단체 활동이다. 정경유착과 경영세습, 그리고 비자금 조성 등 천민자본주의적 경영풍토를 비판하면서 창설이 된 ‘바른경제동인회’ 활동에 전념을 했던 것이다.

내가 바른경제동인회와 같은 단체를 만들어 보자는 구상을 한 것은 1989년부터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88올림픽이 끝나고 89년부터는 노동쟁의가 봇물 터지듯이 일어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행동이 점점 더 과격해져 노조원들이 경영자를 구금하거나 린치를 가하는 경우까지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노사화합은 물 건너 간 것이고 생산성이 크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회사 경영자체가 어려워지게 된다.

노조원들이 과격해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업인들 스스로 사회로부터 불신을 당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 반성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업의 경영자가 스스로 투명한 경영을 하고 합리적인 노사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단체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도 2차 대전 패전 이후 이런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나는 일본에 출장 갔을 때 일본의 노사분규 극복과정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당시의 관련 문헌들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일본의 ‘경제동우회’라는 단체를 알게 됐다. 이 ‘경제동우회’라는 단체는 노조와 미군정청에 대한 기업인 차원의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로, 인상적인 것은 근로자들과 동반자 관계라는 기본 틀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이런 단체를 하나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국해서 여러 사람들과 접촉한 결과, 투명한 경영 문화 정착과 합리적인 노사관계 정립을 목표로 하는 단체 설립에 동의해 따라올 기업인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초기에는 우회작전을 편다는 심정으로 ‘경실련’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1990년에 우리 KSS해운에 사무직노조가 결성됐다가 해산되는 일을 겪으며 나는 보다 구체적인 단체 설립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92년 10월에 나의 모친께서 돌아가셔서 경실련 서경석 사무총장이 조문을 왔는데, 서경석 총장은 그 자리에서 단체 결성을 서두를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12월에 나와 도재영, 김종수, 오수관, 서경석 등이 모여서 준비 모임을 갖게 됐고, 다음해 2월에는 3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발기인 총회도 개최했다.

‘바른경제동인회’의 창립총회는 1993년 3월 30일에 내빈을 포함해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회원들 가운데 유명인사는 광림기계 윤창의 회장, 베가물산 김종수 사장, 김정문 알로에 김정문회장, 대한해운 이맹기 회장 등이었으며 나는 이 창립총회에서 초대 대표간사로 선출이 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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