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현 교수(고려대 법대, 동경대 법대 객원 연구원, captainihkim@korea.ac.kr)

▲ 김인현 교수

나의 지리적, 인적, 학문적 지평의 확대과정

교수에게는 3년 근무에 6개월씩 안식학기가 주어진다. 작년 11월 동경대 법대로 결정이 났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아서 망설였지만, 이미 정하여진 것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한중일은 해상법의 교류는 고려대, 와세다대, 대련해사대학을 중심으로 오래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되어한다. 9월 1일 여기에 와서 정착한지도 보름이 지났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도다이마에(東大前) 역 바로 앞에 있는 오이와께(追分) 외국인 기숙사에 들었다. 아침은 사먹는다. 건강식품이라는 낫또에 맛을 들여 매일 낫또 정식을 사 먹는다. 지도교수에게 인사도하고 연구실도 배당을 받았다. 조금 익숙해지자,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기숙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500미터에 아침식사를 하는 곳을 찾았다. 두 번 세 번을 가니 그 식당은 완전히 익숙해졌다. 북쪽으로 더 올라가보기로 했다. 책방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가니 동양대학이라는 제법 큰 캠퍼스가 나왔다. 오른쪽으로 작지만 아기자기한 식당들이 나타났다. 이태리 식당, 일식집, 내가 좋아하는 튀김집 등이 있다. 더 걸어 올라 갔다. 한참을 걸으니, 갑자기 걱정이 된다. 돌아갈 수 있을까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책방을 찾고, 아침을 먹는 식당을 거치고 우회전해서 대로를 따라 내려가면 나의 거처인 기숙사가 나올 것이다. 그 길이 선명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안도가 된다. 5분 정도 더 걸어 올라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왔다. 이정표가 된 그 책방을 찾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문제없이 기숙사에 돌아왔다.

일요일에는 저녁 무렵 남쪽으로 걸어보았다. 동경대의 정문이 세 개나 나온다. 왼쪽에 아까몬을 끼고 더 내려갔다. 전철 역까지 가 보았다. 북쪽은 조용한 교육의 마을 같다면 남쪽은 번화가이다, 상권이 형성되어있다. 식당도 고급이다. 종류도 다양하다. 정문 앞에 있던 법률서적 쥬리스터를 발간하던 출판사 유비각(有斐閣)이 없어져버렸다. 과거에 동경대에 올 때에는 유비각이 이정표가 되었었다. 유비각 바로 앞에 있는 정문을 들어가야 바로 법대가 나온다. 좋은 이정표를 하나 잃어버렸다. 다른 이정표를 찾아야 할 부담이 생겼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걸었다. 갑자기 어둠이 내려서 캄캄한 길을 걷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길을 나설 때 보아두었던 이정표들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두려움이 앞선다. 바로 뒤로 돌아섰다. 다행히 정문을 확인하고 전철역을 지나니 길을 잃지 않았구나 안심이 되었다. 옆에 제자 한명이라도 있었으면 이런 불안감은 없을 터인데. 무사히 기숙사로 돌아왔다.

다음 주에 왔던 북쪽 길을 더 걸어서 한 불록을 더 걸어 올라갔다. 지난 번에 찾아두었던 식당을 다시 확인했다. 돌아오는 길에 불현 듯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현재 내가 하는 일이 동경대에 정착하여 6개월 있으면서 시간적 공간적, 인적, 학문적 활동범위를 넓혀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 사람의 삶의 과정은 이러한 시공간의 확대의 과정으로 가득 채워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축산항이라는 조그만 어촌에서 태어났다. 내가 아는 인식의 범위는 내가 태어난 축산항 우리 집 마당에 머물렀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형 그리고 동생들이 나의 인식의 전부였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염장이라는 곳에 제사를 모시러 가면서 2키로 미터 떨어진 동네를 알게 되고 거기에 우리 일가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인식의 범위는 친가 직계가족에서 일가로 넓어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동급생 아이들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산천을 뛰어놀면서 축산항 전체를 알게 되었다. 영덕 외가에 가서 방학을 보내면서부터 달산에 있는 외가집과 외가식구들로 인식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중학교는 영해라는 곳으로 갔다. 아침 조회를 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였다. 1반에 들어갔는데, 60명의 학생들이 처음 보는 아이들이라 서먹서먹했다. 곧장 친구가 되면서 영해중학교 동급생들을 대게 알게 되었다. 애들과 영해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영해라는 곳을 조금씩 더 알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나의 지리적 인식의 범위는 축산항이라는 곳에서 영해로 확장되었었다. 영해고등학교를 거쳐서 부산소재 한국해양대학에 진학하면서, 나의 영역은 더 넓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온 동기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각 지역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인구 1000명 동네에서 태어나 인구 300만명이 사는 부산사람이 된 것이었다.  

졸업을 하고 송출을 하여 선박회사에 들어가 출국을 했다. 아랍에미레이트의  코랄파칸에서 승선한 선박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얀부와 제다, 라스타누라를 다녔다. 아랍의 무미건조한 풍경을 체득했다. 다음 배부터는 정말 세계 여러곳을 헤집고 다녔다. 대만에서 북구 노르웨이까지 장장 50일 항해를 했다. 중간에 테네레페라는 곳에 잠깐 기항했다. 그 뒤로 미국동부, 서부, 캐나다, 로테르담, 일본 및 중국의 여러 항구들 .... 태평양 횡단항해, 대서양항해 이렇게 오대양 종단항해를 거쳐 호주에 도착하기도 했다. 지구의 남단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 항해했고, 다시 남미의 최남단인 마젤란 해협도 항해해보았다. 이렇듯 나의 공간적 인식과 행동반경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어졌다. 선원이 된 덕분이다.

선장을 그만두고 고려대 대학원에 들어왔다. 꼭 뵙고 싶었던 책에서나 뵐 수 있었던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법학을 배우게 되었다. 나의 인적 인식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연구실의 원생들과 한 식구가 되면서 인적 네트워크가  넓어져갔다. 김&장 법률사무소에 초빙되었다. 120명의 프로페셔널과 차츰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프로페셔널이 서울대출신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최고의 실력과 명성을 가진 법조인을 많이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고 40살에 선생이 되었다. 그렇게 낯설었던 호남땅 목포에 내려가서 교편을 잡았다. 서울과 목포를 주말에 오갔지만, 호남의 음식, 예술,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태생으로부터 얻은 영남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호남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20년을 교편을 잡았으니 수많은 제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좋아하는 제자들, 나를 따르는 제자들도 몇 있다. 고려대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제자 기르기에 나섰다. 그 결과 10년 동안 자식과 같은 친밀감을 느끼는 제자 50명이 주위에 있다.

해운업계와 고향의 발전을 위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하다보니, 인적 지평이 많이 넓어졌다. 해운업계의 사람들을 알게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선박건조 및 선박금융법 연구회를 결성하여 근 10년 동안 회장으로 활동하니 이 분야에 인적 범위가 확대되었다. 고향의 발전을 위하여 동문회, 영덕학사, 등의 일을 하다보니, 영덕분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최근에는 페이스 북과 밴드 등을 통하여 공간의 확대, 인적 범위의 확대도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이와 같이 60년 동안 시간적 공간적 인식의 범위 그리고 인적 교류의 범위의 확대가 점진적으로 조심스러운 가운테 이루어져왔음을 깨닫게 된다. 삶 자체가 이런 시간적, 공간적, 인적 인식과 교류의 확대과정인 것처럼 느껴진다. 유년시절 축산항, 영해를 벗어나지 못했던 나를 현재의 크게 확장된 공간에서 다양한 인적교류를 하고있는 나와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그러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이런 확대가 이루어났는지 생각해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위험하지 않을까? 우리 집까지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할아버지, 어머니 손을 놓고 혼자서 멀리가도 충분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길을 잃지는 않을까?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지면서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딛게 되었다. 학년을 올라가면서 반이 바뀔 때에도 새로운 친구들과 잘 사귈 수 있을까 걱정되고, 반이 바뀌지 않았으면 하고 원했다. 특히, 직장을 옮기고 새로운 집단에 들어갈 때는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우연히도 나는 신천지를 개척하는 사람 마냥 선배나 친구들이 없는 직장을 찾아다닌 것처럼 되었으니… 그렇지만, 나는 견디어내었고 해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탐구심이 더 강했나보다. 

문득,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난다. 1492년 콜럼브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 까지 지중해의 사람들은 스페인의 끝단에 있는 지부랄타까지만 항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여기를 벗어나는 순간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만다고 믿었다. 먼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인류문명이 생기고 나서 2000년 동안을 이런 좁은 인식의 폭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왔다. 그런데, 동양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다는 말들이 돌았고, 동방에서 사람들이 오고갔다. 이에 용기있는 자들이 그 잘못된 믿음을 깨트리고 항해를 감행했다. 그리고 지브랄타를 벗어나도 낭떠러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동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콜럼버스는 항해했고, 드디어 서인도 제도에 도달하였다. 또 어떤 용감한 자는 북으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온다고 믿었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이와 같은 대항해시대의 선각자들의 개척정신에 힘입어 이 지구는 신비에서 벗겨져 누구나가 현재 그 크기와 위치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목숨을 내어놓고 한발짝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달리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그로 인하여 시장개쳑이 이루어졌고, 교역은 확대되었으며 결국 인류번영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미지의 세계에 아예 겁을 먹고 도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미지의 세계에 도전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도전한 사람들 덕분에 오늘날 발전된 인류의 문명이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인간의 삶이지만, 정착한 곳에서 하나씩 지리적, 인적 교류를 넓히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 그렇게 하면서 성장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창조적인 생산을 해낸다는 것, 이런 것들이 모여 집단 지성이 되어 이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배는  이 사회에서의 역할을 다하고 후배들에게 바통을 넘기고 이 땅에서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것들은 하나씩 이 땅에 축적이 된다. 이 땅을 살다간 수 많은 사람들의 미지에 대한 동경과 그에 대한 탐구심의 집합과 축적이 바로 오늘의 인류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나의 일본 동경에서의 새로운 것에 대한 조심스런 진전이 지리적인 범위를 넘어서, 인적 네트워크의 확장, 그리고 학문적인 범위에 이르기 까지 폭넓게 진행되어 조금이라도 우리 사회, 특히 학계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 도전은 바로 내가 하는 것이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제 국내 해운회사의 현지대표와 국제적 선박관리회사의 담당자와 점심 저녁을 같이하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해운산업에 대해 배웠다. 오늘은 와세다 대학교 법과대학의 해상법교수와 상과대학대의 해상보험법 교수와 점심 저녁을 같이 하게 되어있다. 인적 학문적 영역의 확대의 기회가 될 것이라서 기대가 된다(2019.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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