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돌아갈 준비

우리는 서산마루턱을 붉게 물들이고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옆자리 친구가 “나는 9988124할 거야”란다. “무슨 숫잔데”란 물음에 “아흔아홉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하루 이틀만 앓다가 죽을란다”라고 중얼거렸다. 철없어 보이기도 하고 오만하게도 보였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인생 사고四苦라 한다. 태어나 자라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뜻이다. 선현들이 이를 인생 정규과정이라 했다. 진나라 시황제도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려고 별짓을 다 했으나 늙고 병들어 흙으로 돌아갔다.

요즘 인생 120세라고 기염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술로 연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호사스러운 술잔치를 비유함-을 일삼을 만한 별난 사람들에겐 모르지만.

그렇게 오래 살아 뭘 하려고? 가뜩이나 저출산으로 인구절벽이 되어 젊은 사람은 없고 노인들만 사는 세상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너무 오래 살면 가족에게 버림받고 나라에도 재앙이다. 물론 자신도 힘들고.

나는 80을 넘긴 지 수년이 됐다. 참 오래 살았다. 벌써 돌아갔어야 했었는데. 연만하신 부모님의 막내로 태어나 어렸을 때 감기, 배탈, 온갖 병치레를 다 했다. 철 들어서는 주색잡기酒色雜技를 멀리하고 몸을 끔찍이 아꼈기에 지금까지 버텼다.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첫째, 의학발전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내 시신을 가톨릭의과대학에 기증하겠다는 승낙서를 제출하고 등록증을 받아두었다. 시신연구가 끝나면 위령미사를 봉헌하고서 화장하여 의과대학 묘역에 안장된다.

유족에 의해 분묘에 매장되거나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되는 것보다 내 시신이 의학발전에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고, 혹시라도 장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된다면 이 어찌 보람이 아니리오. 부모와 형제, 모교와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한 마지막 보은이기도 하고.

성경에도 그렇지만 성리대전性理大全에도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 했다. 나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렇게 되리라.

둘째,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사전연명의료 의향서 등록증』을 받았다. 인공연명 치료를 하지 말고 자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내 의지를 건강할 때 밝혀둔 것이다.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는 보건복지부 지정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연명의료관리센터에 보관되어 있기에 병원에서 내 의사에 반하여 연명 치료를 할 수 없다.

셋째, 교통안전 증진을 위한 『운전면허증 자진 반납 시니어 카드』를 받았다. 인지능력과 순발력이 바닥난 노령이 운전대를 잡다가 교통사고가 빈발하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을 유도하는 정부 정책이다. 이를 받아드려 나는 기동력을 스스로 포기했다. 내 발을 스스로 잘라버린 같아 참담했지만.

넷째, 『耕海 김종길 안드레아께서 2020년 xx월 xx일 xx시에 운명했음을 알립니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시신은 의학발전을 위해 가톨릭의과대학에 기증되었고, 운명하고서 10일을 지나 알려드립니다』란 부고와 수신처를 아내에게 맡겼다.

일가친척과 친지들에게 번거롭게 조문을 오시게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조용하게 돌아가고 싶어서이다.

다섯째, 가까운 보건소에서 치매 방지 교육을 받고 있다. 숫자와 색깔을 맞추는 뇌 운동과 몸을 뒤트는 스트레칭 몸 운동이다. 고령에 교육을 받는 것이 겸연쩍지만 치매를 앓으며 추하게 사는 것보다 곱게 돌아가고 싶어서 이다.

젊었을 때 기개는 다 어디 가고 무거운 세월을 짊어지고 을씨년스럽게 여기까지 왔다. 나도 섭리대로 살다 육신은 땅에 남겨놓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홀연히 돌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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