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정동국제 서동희 대표변호사

서동희 변호사
서동희 변호사

이번 호에는 해상물건 운송인이 화주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원칙, 달리 말하면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근대민법의 3대 원리중의 하나로서 과실책임의 원칙이 있다. 이는 개인이 타인에게 준 손해에 대해서는 그 행위가 고의 또는 과실에 기인한 경우에만 책임을 지고, 그러한 고의 또는 과실이 없는 행위에 대하여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상물건 운송인이 화주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원리도 크게 보아서는 이와 같다. 즉, 해상물건 운송인에게 화물의 손상이나 멸실에 대하여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만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말을 하면 혹자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해상운송구간중에 화물이 멸실되거나 손상이 되면 해상물건운송인은 손해배상책임을 지게 되는 것인데, 거기에 과실이 있고, 없고는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그것은 입증책임 문제와 과실책임 원칙을 구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통상적으로 해상운송도중에 화물에 손상이 있거나, 혹은 화물의 전부 또는 일부가 멸실된 경우에는 화주는 clean bill of lading 과 양하항에 수령한 화물이 손상되었다는 증빙(예를 들면 cargo convention이나 boat note 등)을 제시함으로써, 일단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고, 해상물건운송인은 그 손해배상청구에 대하여 "화물의 수령, 선적, 적부, 운송, 보관, 양륙과 인도에 관하여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하였음"을 증명하여야 한다(상법 제788조 제1항). 실무적으로는 화물의 손상 또는 멸실의 원인이라고 주장되는 사유에 대하여 해상물건운송인의 과실이 개입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손상 또는 멸실의 원인에 해상물건운송인의 과실이 개입된 것이 전연 없음이 증명되었으면, 청구를 당한 그 해상물건운송인은 상법의 위 조항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된다. 그런데 자주 문제되는 경우로는 화물손상의 원인이나 멸실의 원인이 명백히 밝혀지지 아니하는 경우이다. 운송도중에 여하한 원인으로 화물의 손상 혹은 멸실이 발생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을 경우이다.

이때가 바로 "입증책임"이 발동되는 순간이다. 입증책임이란 "어떠한 사실의 존재 혹은 부존재가 확정되지 않을 때에 당해사실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취급되어 법률판단을 받게 되는 당사자 일방의 위험 또는 불이익"으로 정의된다(이시윤저 신정 3판 민사소송법 569쪽). 이때 누구를 불리하게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근대민법 3대 지도원리중의 하나인 과실책임의 원칙은 본래 그러한 불이익을 과실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 즉, 현재의 경우에는 화주(claimant)에게 불이익을 지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처럼 "입증책임"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해상물건운송계약에 있어서 해상물건운송인이 화주에 대하여 지는 책임과 관련된 "입증책임"이 해상물건운송인에게 있음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즉, 화물의 손상 또는 멸실의 원인이 밝혀지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로 인한 불이익이 해상물건운송인에게 떨어지며, 반사적인 이익이 화주에게 떨어지게 된다.

해상물건운송인으로서는 "화물의 수령, 선적, 적부, 운송, 보관, 양륙과 인도에 관하여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하였음"을 증명하여야 하는데, 화주가 이것이 바로 화물의 손상 또는 멸실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나오는 사항이 있으면, 그러한 원인에 대하여 해상물건운송인의 아무런 과실이 개재된 바가 없다고 주장하면 된다. 반면, 화주가 주장하는 화물손상의 원인이 분명하지 아니하고, 단지 운송도중에 발생된 사실만을 주장하고 증명할 때에는, 해상물건운송인으로서는 부득이하게 관련 화물의 해상운송과 관련하여 "화물의 수령, 선적, 적부, 운송, 보관, 양륙과 인도에 관하여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하였음"을 증명하여야 한다.

그런데 해상물건운송인이 증명하여야 할 사항은 "부존재" 사실로서, 어떠한 사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는 달리, 부존재 사실의 증명은 지극히 곤란하다. 결국, 해상물건운송인이 스스로 화물손상의 원인을 밝혀 내고, 그 원인과 자신의 과실과는 무관함을 증명하여야 하는 큰 부담을 지게 된다.

여기서 해상물건운송인의 "면책 list"가 등장한다. 해상물건운송인이 실무상 가장 애용하는 면책사유는 역시 "송하인의 행위"(상법 제789조 제2항 6호), "운송물의 포장의 불충분"(같은 조 제9호), "운송물의 특수한 성질 또는 숨은 하자"(같은 조 제10호)"가 있다. 해상물건운송인으로서는 "황천(bad weather)"을 상법 제789조 제2항 제1호 "해상 기타 항행할 수 있는 수면에서의 위험 또는 사고" 또는 제2호"불가항력"에 해당되는 면책사유로 주장하고 싶은 대목이 자주 있는데, beaufort scale 기준 10 이내의 황천이었다면 면책사유로 주장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물론 면책사유가 되는 "황천"이 일률적으로 정하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면책사유들이 화물의 손상 또는 멸실의 원인이라는 것을 입증하면 해상물건운송인은 손해배상책임을 면할 수 있다. 해상물건운송인이 선박을 해당 항해를 감당할만하게 유지, 보수하는 책임(소위 감항능력에 관한 주의의무)을 소홀히하거나, 기타 "화물의 수령, 선적, 적부, 운송, 보관, 양륙과 인도에 관하여 주의를 해태한 경우"(이를 "항해과실" 또는 "선박 관리상의 과실"에 대비하여 강학상으로 "상사과실"이라고 함)에 해당되면서, 동시에 면책사유가 화물의 손상 또는 멸실의 원인을 제공한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때는 면책사유가 되는 사유와 책임을 지는 사유가 경합하는 경우로서 그 두가지 원인이 각각 기여한 부분이 확실히 드러나면 그 비율에 따라 면책이 되거나 책임을 지거나 하게 될 것이다. 만일 해당 손해가 어느쪽 원인에서 발생된 것인지 분명히 규명하지 못하면 해상물건운송인은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 이것이 미국법원에 의하여 확립된 "Vallescura" 법칙이다. 그 사건에서는 불충분한 통풍(improper ventilation)과 황천(즉, peril of the sea)의 사유가 경합하였었다.

요컨대, 해상물건운송인의 손해배상책임은 과실이 있어야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과실책임"이며, 과실이 없어도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무과실 책임"이 아니다. 따라서 해상물건운송인이 화주가 주장하는 화물손상에 대하여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해상물건운송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경우에는 손상의 원인을 밝혀 내고, 그 원인에 자신이 무관함을 보임으로써 면책을 시도하여 볼 수 있다.

반면, 화주로서는 해상물건운송인이 "과실책임"을 지지만, 그 과실이 없음을 증명하여야 할 책임은 해상물건운송인에게 있다는 "입증책임"의 원칙을 이해하고, 해상물건운송인이 스스로 화물손상의 원인과 자신의 과실이 무관함을 증명할 때까지는 손해배상청구에서 승소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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