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선박 구조변경이 사고원인" 지적도

▲ 1400여명의 여객이 탑승한 채 지난 2일 홍해에서 침몰한 'Al Salam Boccaccio 98'호
  승객 1318명과 승무원 96명을 태운 이집트 여객선 '알 살림 보카치오 98'호가  3일 새벽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사이의 약 57마일 떨어진 홍해상에서 침몰했다.

 사고여객선은 2일 오후 7시경에 사우디 두바항을 떠나 3일 오전 3시경에 이집트 사파가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정확한 사고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집트 당국은 당시에 모래바람이 많이 불고 파도가 높았다는 점을 들어, 기상악화로 인한 침몰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침몰사고 이후, 이집트 당국의 구조활동으로 200여명의 승객이 구조되었으나, 사고시간이 밤 늦은 새벽이라 대부분 승객이 잠을 자고 있었고, 현지 기상악화로 인해 구조작업에 어려움이 있어 상당수의 승객들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고 여객선인 '알 살림 보카치오 98'호(1만 8000톤급)는 길이 118m, 폭 24m 인 파나마선적의 여객선으로 1971년 이탈리아에서 건조되었다.

 사고 이후, 이집트당국은 구조헬기와 프리깃함 4척을 동원해 수색, 구조작전을 실시하고 있다. 

AP통신은, 이집트 구조헬기가 침몰사고 후 10시간후에나 사고지점에 도착하는 등 구조작업에 많은 혼선이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생존자들은 구조헬기가 구조신호도 무시한 채, 머리위에서 선회만 하였다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생존자중 일부는 침몰후 24시간만에 구조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고 당시 미국은 바레인에 주둔하고 있던 미 5함대 P3-오리온 해상정찰기를 지원하려고 했고, 영국 또한 홍해상에서 작전중인 전함 '불워크호'를 급파하려 했지만, 이집트 당국은 처음에 거절하였다가 나중에 구조제의를 승낙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사고여객선에는 이집트인 1200명, 사우디인 99명, 시리아인 3명, 수단인 2명, 캐나다인 1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은 사우디에서 일하다가 주말을 맞아 이집트로 귀환하는 노동자들과, 사우디에서 일하는 가족을 만나고 돌아가는 사람등 거의 이집트 서민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AFP통신에 의하면 사고선박은 탑승정원을 최고 3배까지 늘리기 위해 갑판을 더 얹는 방법으로 구조를 바꾼 구형 이탈리아 선박이라고 밝혔다. AFP통신은 이런 선박은 갑판이 4개까지 추가되면서 키가 커져 균형을 쉽게 잃을 수 있다며, 무리한 선박구조변경이 사고원인일 수 있다고 프랑스 전문가의 말을 통해 인용보도했다.
 
또한 전문가들은 사고선박이 비교적 큰 편이어서 내해인 홍해에서 바람과 파도등 기상악화만으로 전복돼 침몰되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대해 사고선박 소유쥬인 엘-살람 해상운송측은, 사고선박은 지난해 6월 국제기준에 따라 실시된 구조검사를 통과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사고원인에 대해 이집트 대통령실 대변인은 "배가 가라앉은 속도와 구명보트가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은 (안전)문제가 있었음을 뒷받침한다"면서 "하지만 조사결과를 속단하긴 이르다"고 말했다.
 
또한 침몰사고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고 여객선은 항해 초기에 갑판에서 화재가 발생했었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이집트 수송장관 무하메드 루트피 만수르(Mohammed lutfy mansour)는 "당시 화재는 소규모였고 조사관들이 그 화재가 침몰과 연관되어 있는지 철저히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고 "사고 선박엔 폭발은 없었다"고 전했다. 

영국 신문 '더 타임즈'는, 런던 주재 이집트 대사관의 말을 인용해서 사고 당시 배에는 정원 1400명이 넘는 1415명이 탑승했다고 전했다. 또한 '알 살림 보카치호 98'는 카페리형식으로 자동차 220여대도 탑재되어 있었다고 알려졌다.

140여명의 구조된 생존자들은 토요일 아침에 이집트 항구인 Hurghada에 도착, 즉시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당시 침몰사고 생존자들 중 일부는 맨발이었고, 사고 당시의 공포와 추위로 인해 떨고 있었으며 담요로 몸을 감싼 모습이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3년 10월 위도 앞바다에서 서해 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의 희생자를 낸 조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서해 훼리호에도 정원 221명을 훨씬 초과한 362명을 탑승시키는 등 안전불감증이 문제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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