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음암면 도당리

▲ 이종석 사장
원래 고향집은 서산군 음암면 도당리 278번지였다. 사랑방에서 천자문을 가르쳐 주시던 할아버지와 베를 짜면서도 한글을 깨우쳐 주시던 어머니(동래 정씨:혜근)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누룽지를 꽁꽁 뭉쳐서 손에 쥐어 주시기도 했지만, 한글을 가르쳐 주실 때에는 무척 엄하신 분이셨다.

다섯 살 되던 해(1945년) 음암공립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공식 절차에 따른 입학은 아니었다. 세 살 위인 삼촌(능교)이 학교에 갈 때, 무작정 따라가서 교실에 들어갔는데 선생님께서 의자에 앉으라고 하셔서 저절로 학생이 된 것이다. 조회 때 검은 제복을 입은 일본 교장 선생이 운동장 서쪽 제단이 있는 계단에 올라가서 무슨 소리를 크게 외치고 고개를 숙이면 학생들이 따라했다. 송아지와 달이 하늘에 떠있는 그림이 있는 일본 책을 배웠던 일이 떠오른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해방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한길을 내달으며 만세를 불렀다.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일학년인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도 일본인이 아닌 이종필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어 이미 한글을 깨우쳤기에 나는 음암초등학교에서 가장 어린 학생이지만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면 상급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부르는 대로 땅바닥에 글씨를 써보라 하고는 내가 받아쓰면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딱지나 구슬을 주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을 두셨는데 모두 잘 기르셨다. 그래서 나라에서 표창장을 받았다고 한다. 위로 고모 세 분은 출가를 하였고 아버지(諱:成敎)는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서 수원 신풍초등학교에서 근무하셨다. 넷째 삼촌도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객지 생활을 하였다. 나머지 가족들은 대가족을 이루어 같은 집에서 살았다.

우리 마을은 뒤에는 산, 앞에는 논과 밭이 있고 산 너머에는 간대산에서 양대리 쪽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을 하셨고, 할머니는 삼베, 모시, 무명, 명주 등 길쌈 일을 하시는 등 온 가족들은 논과 밭을 경작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큰 며느리인 어머니와 둘째 며느리인 숙모는 식구들의 먹을거리를 준비하느라 달빛을 받으며 절구통에 보리방아를 찧어대곤 했다.

하루는 우리 집 일을 도와주었던 양대운이라는 사람이 4월 초파일이라며 나를 우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큰 산 너머에 있는 ‘안국사’라는 절에 데리고 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부처님을 보았다.

3학년 때쯤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집배원 아저씨가 나의 이름을 묻더니 나의 초등학교 입학원서를 전달했다. 내가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하자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열 명이 훨씬 넘는 식구들의 밥상을 모두 차려서 넓은 앞마루에 올려다 놓고 어머니는 식구들이 정신없이 식사를 하는 동안 잠시 툇마루에 등을 붙이고 피로에 지친 몸을 쉬시곤 했다.

4학년 때인 것 같다. 어머니가 외가댁에 함께 가자고 하셨다. 하루라도 학교에 가지 않거나 지각이라도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갓난쟁이 동생을 업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신 어머니를 따라 하루 종일 걷다가 날이 어두워져 고북(高北) 어느 민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다시 걸었다. 갈산(葛山) 오른쪽 방향으로 갯벌을 건너고 긴 냇둑을 몇 번이나 지나 수박산을 넘었다. 어머니는 저 아래 보이는 기와집이 외가댁(홍성군 서부면 양곡리)이라며 지금 굴뚝에서 연기가 나니 여기서 쉬었다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저녁을 잡수신 다음에 들어가자고 하셨다.

어둠이 드리워질 때 외가댁에 도착하니 외할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이 크게 놀라며 맞이하여 주셨다. 외할아버지(諱:鄭寅直)는 한의사(한약국)이셨고 어머니는 11남매 중 맏딸로 멀리 서산(음암)으로 출가하셨던 것이다.

▲ 음암면 지도
나는 외가댁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정신없이 뛰놀다가도 가끔 외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수심이 깃든 대화가 오가는 느낌을 받았다. 눈물을 훔치시며 우리 모자를 배웅해주시던 외할머니를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외할머니 댁에 오는 길을 잘 알아두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으셨다.

내가 5학년 되던 해 봄, 보리밭이 누렇게 물들 때쯤이었다. 학교 교사직을 내놓고 다른 직업을 구하시겠다며 객지로 떠나셨던 아버지가 귀가하신 날(음 1949. 4. 23)이었다. 어머니는 색동지갑을 만들어서 내 머리맡에 놓으시고 30세의 한참 나이에 먼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리고 얼마 후(1949. 6. 26)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었다고 했다. 안두희라는 육군소위가 권총을 쏘았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김구 선생을 추모하는 노래를 가르쳤다. “… 지금 저기 아우성치며 우네” 하는 추모노래를 배운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달 만에 우리 집은 가산을 정리하여 인천 신흥동으로 이사하게 됐다. 음암면 도당리의 고향집에서 이삿짐을 수레에 싣고 문양리를 거쳐 성연면 명천 포구에서 인천행 여객선을 타고 갔다. 여객선은 물이 들어올 때 따라 들어왔다가 사람들이 내리고 난 후에는 썰물로 뻘에 얹히게 된다.

그러는 동안 인천으로 갈 승객들이 배에 탄다. 밀물이 되어(때로는 배에서 자고 난 후) 다시 배가 물 위로 떠오르면 그때 발동기를 토치램프로 달구어 엔진을 작동시켜 운항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조운호’, ‘보성호’, ‘칠복환’ 등 소구발동기를 장착한 100톤급의 여객선이 번갈아 인천-명천 간을 운항하였다.

인천으로 이사를 한 후 아버지는 그곳에서 조그마한 야채가게를 열었다. 나는 인천 신흥초등학교로 전학하려 하였으나 나이가 기준에 미달하여 대기상태에 있던 중 6·25전쟁을 만나게 되었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