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포화 속 피난생활

▲ 이종석 사장
우리는 둘째 숙부 댁에 얹혀 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숙부는 전쟁발발 전에 지역방위군인 호국군 경력이 있어 북한 인민군 점령하에서 불안에 떨다가 제일 먼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징발되었다. 집안은 불안과 궁핍 속으로 빠져들었다. 방 한 칸에 열 명이 넘는 대식구가 함께 잠을 자고 밀기울 죽, 피죽(논에서 벼와 함께 섞여 자라는 잡풀 씨를 갈아서 밀가루·보릿가루 등을 약간 섞어 쑨 죽), 감자 등으로 연명하였고, 농사일을 하며 나무(땔감)를 해야만 했다. 당시는 모든 음식조리와 난방시설이 모두 나무를 이용하게 되어 있어서 땔감이 많이 필요했다.

그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해 논에 심었던 벼가 모두 말라 죽어 버렸다. 피난길에 아버지와 중간에서 헤어졌던 넷째 삼촌이 우리가 내려온 후 뒤따라 왔으나 둘째 숙부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는 말에 불안을 느끼고 다시 인천 쪽으로 가셨다. 그 뒤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어떤 집에는 나무기둥에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만세’라고 써 붙어 있었고, 길거리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는 플래카드도 걸려 있었다.

전쟁발발 전 공산주의자라고 조사를 받았던 옛날 초등학교 송모 담임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 “이제는 우리들 세상”이라며 솔직(?)하게 환성을 질렀다. 딱쿵하는 총소리가 나면 우익인사가 잡혀가 총살당하는 거라고 했다. 우리(아이)들은 소년단이라는 이름으로 저녁에 불려나가 노래를 배웠다. 애국가라고 하며 “아침은 빛나라 이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한……”으로 시작되는 노래와 “장백산 줄기줄기 피 흘린 자욱……” 등의 노래를 익혔다.

극심한 궁핍과 생활고로,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막내 여동생과 사촌 남동생도 애처롭게 죽었다. 할아버지는 이 어린 주검들을 근처 야산에 묻었다.

어른들은 유성기, 기타 등 가재도구를 내다가 통보리, 벼 등과 바꿔왔고 아이들은 들에 나가 쑥과 나물을 뜯어와 연명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여의치 않아 어려울 때는 친척집을 전전했다. 나는 주로 막내 삼촌과 함께 다녔다. 한번은 태안 셋째 숙부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인지를 지나 서산으로 들어오다가 따발총을 멘 인민군들을 만났다. 그들은 기진맥진한 듯 피로에 지쳐 태안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발을 절름거리는 군인들도 많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돌아왔다.

▲ 밀려드는 피난민의 모습(40계단 문화관)
후에 안 일이지만 인천상륙작전에 맞춘 유엔 연합군의 반격으로 퇴로를 잃은 인민군 패잔병들이 바다 쪽으로 도주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며칠 후에는 당진군 정미면 대운산리(대방틀 마을) 둘째 고모 댁에 갔다가 시냇가 건너 큰길로 군용트럭이 서산 쪽으로 지나가면서 부르는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소리를 들었다.

대방틀 마을 고모 댁에서 수수로 만든 떡을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정미면 매방리(비새마을) 셋째 고모 댁으로 향했다. 그곳은 작은 산을 몇 개 넘어야만 했다. 어느 고개인지 산꼭대기에서 두 사람이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지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들한테 들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여 열어 보이니 그냥 보내 주었다. 셋째 고모 댁에서 우리는 오면서 보고 들은 섬뜩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다락방에 숨어 있던 고모부(한기준)는 동료와 함께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밖으로 내달렸다.

남한을 점령했던 인민군들이 억류했던 군경과 그 가족 등 우익인사들을 죽이고 패퇴했다고 하였다. 9월 28일 수복 직후 할머니와 나는 소식을 모르는 아버지와 넷째 삼촌을 찾아보려고 당진 포구에서 목선(돛단배)을 타고 삼길리를 거쳐 이틀 만에 인천 집을 찾아갔다.

인천항에는 뒤집어진 군함도 보였고 육지는 폭격으로 처참하게 불타고 파괴된 건물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총과 배낭을 멘 외국 군인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신흥동 집은 다행히 폭격을 피했으나 이미 다른 사람의 집이 되어 버렸고 아버지와 넷째 삼촌은 행방불명이었다.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있던 넷째 고모(필순)의 말로는 아버지는 불탄 창고에서 곡식을 주워가라는 연락을 받고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삼촌은 계속 숨어 지내다가 연합군의 인천상륙 직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집은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아버지가 잔금을 치르지 못한 상태로 행방불명되어 전 권리자가 제3자에게 다시 팔아먹고 도주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서산 수석리 숙부 댁으로 돌아왔다.

▲ 피난을 가기 위해 탄 기차
매일 나무하는 일이 나의 주 임무가 되었다. 가뭄과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생활고로 병환이 깊어지신 할아버지께서는 다음 해 음력 3월 28일 우리가 논에서 못자리 작업을 하던 때 돌아가셨다.

그래도 제2 국민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아사자(餓死者),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하였던 속에서 극적으로 귀가한 셋째 숙부(仲敎)가 함께 임종(臨終)을 볼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셋째 숙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제2 국민병 복무 시 얻은 병으로 혼수상태를 몇 차례나 겪으며 병석에 누워있다가 수개월 후에 간신히 일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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