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을 찾아 서울로

▲ 이종석 사장
약 2년간 생계를 위해 장사를 했지만 떠돌이로 장사를 하다 보니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돈을 좀 벌었다가도 손해를 입는 경우도 많아 큰돈을 벌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돈을 번다해도 그것이 큰 보람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친구들이 중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면 너무나 부러웠고, 서울에 가면 고학으로 야간 중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설랬다. 이순신 장군에 관한 글을 읽고 감동하여 그와 같은 장군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왔었고, 군인이 되어 큰일을 하려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이른 봄, 그동안의 장사를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아버지께 나의 결심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객지에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도 없이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느냐고 걱정을 하셨지만 말리지는 않으셨다. 돈을 긁어모아 계란을 사서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홍성으로 가 홍성역에서 다시 천안행 기차를 탔다. 아무런 연고도 목표도 없이 떠난 길이라 불안하였다.

그러나 서울도 사람 사는 곳이니 길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천안에서 서울행 기차로 갈아타고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영등포에서 전차를 타고 노량진으로 갔다. 전차는 전쟁으로 인도교가 폭파되어 복구가 안 되었기 때문에 노량진이 종점이었다. 노량진에서 부교(군용 고무보트로 연결한 다리)를 건너 한강 중지도에서 다시 전차를 타야했다.

전차는 ‘동대문’행과 ‘을지로’행이 있었다. 왠지 동대문행을 택하고 싶었다. 도로 위를 버스와 승용차가 함께 달리는 동대문행 전차를 타고 난생 처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 시가지를 구경하면서 동대문이라는 운전기사(당시에는 차장이라고 불렀다)의 육성 안내 소리를 듣고 종점에서 내렸다.

종점은 동대문 바로 옆 경전(경성전기) 배차장(시발지)이었다. 우선 시장이 궁금했다. 마침 동대문시장 근처였으므로 가져온 계란을 시장에 팔고,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당장 저녁을 먹고 잠자리를 찾을 궁리를 해야 했다. 종로 5가 시장 뒷골목에서 싼 식당집을 찾았다. 실비로 저녁 식사도 하고 잠까지 잘 수 있었다.

전쟁으로 건물이 파괴된 빈터에 천막을 치고 식당과 20여평 되는 온돌방을 만들고 담벼락도 없는 방바닥엔 가마니를 깔았다. 일명 하숙집이라 불렀다. 노동자들과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 약 30명이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양력 2월 하순경이라 아직 날씨가 차가웠으나 장작불로 불을 때 이불이 없어도 추운 줄 모르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는데 처음 듣는 사투리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특이한 억양이라 이채로웠다. 새로 온 충청도 애라고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시장을 돌면서 무슨 장사를 할까 궁리하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담배, 껌, 캐러멜 등을 샀다. 양어깨에 멜빵끈을 하고 물건 상자를 앞으로 들고 시장을 오가며 팔았다. 다행히 식생활을 유지해 나갈 정도의 수입은 되었다.

이제는 공부할 길을 찾아야 했다. 야간 중학교 학생모집 광고를 보고 학교를 찾아갔다. 성동구 신당동 서울 제2운동장 너머 한양공고 아래쪽에 위치한 ○○고등공민학교였다. 입학상담 결과 입학금이 당시 돈으로 3,700원이라는 것이다. 나는 돈이 2,500원밖에 없으므로 우선 입학하고 나머지는 후에 납부할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였더니 학교 측에서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그렇게도 갈망하던 중학교를 가게 되었고 배움의 길이 열렸다. 자랑스럽게 학교에서 받은 모표와 배지를 달고 오후 5시면 학교로 갔다. 영어 A, B, C, D를 배우고 수학 ‘-a’ ‘+a’ 등을 배워나가면서 본격적인 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학교생활의 감격도 잠시뿐, 우선 수입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것으로는 숙식을 해결하고 책을 살 돈도 모자랄 뿐 아니라 학교에 납부해야 할 미납 입학금과 수업료를 낼 목돈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잠을 잘 때는 팔다 남은 물건을 머리맡에 놓고 가진 돈은 지갑에 넣어 주머니에 넣고 자는데 며칠에 한 번씩 물건도 없어지고 지갑도 없어졌다.

이즈음 우리 반에 B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옥수동에 자기네 빈 집터가 있는데 거기에 천막을 치고 함께 살면서 학교를 다니자고 제의했다. 그간 우여곡절을 겪어봤기 때문에 잘못하면 손해 보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같은 학교 다니는 동급생이니 믿어도 되겠지 하며 얼마 안 되었지만, 모두 털어 그에게 건네고는 천막 칠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그 친구는 약속을 하루하루 미뤘고, 장사도 잘 안되어 밥값도 없을 때가 있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돈을 벌 수 없어 밥을 사 먹지도 못하였다. 식당집에서 밥을 먹는 것으로 돼있었기 때문에 밥을 사 먹지 않으면 그나마 방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어 처마 밑에서 잠자는 일도 있었다.

그 친구는 신당동 중앙시장 노점에서 꿀꿀이죽을 사주면서 옥수동 천막 계획은 불가능하게 됐다며 구두닦이 통을 하나 내밀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알고 보니 그는 불량배이며 힘도 센 놈이었고, 또한 같은 반 학생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구두닦이로 변신하여 종로 5가 동대문시장, 방산시장, 이화동 등을 돌며 구두를 닦았다.

학교에 약속한 입학금 잔액 납부기한이 다가오고, 자고 공부할 하숙집은 너무나도 불결하고 불편해 고민에 빠졌을 때 언뜻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고향 서산에서 장사할 때 다섯 장(서산, 태안, 부석, 해미, 운산장)에는 나의 노점자리가 있었다. 이 자리가 좋은 자리라고 탐을 내며 자기에게 팔라고 졸라대던 양잿물 장수 박씨 아저씨가 생각났다.

종로5가에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고 거기서 서산행 버스가 출발했다. 일요일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의 집은 운산(서산군) 시가지에서 해미 쪽으로 약 3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날은 봄비가 오고 있었는데 비를 맞으며 흙탕길을 걸어 박씨 댁을 찾아갔다. 그는 마침 집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내 장사터(노점)를 5,500원에 팔겠노라고 했더니 두말도 않고 달라는 금액의 돈을 내놓았다. 그 돈을 받아가지고 서산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하룻밤을 지낸 후 이불을 싸가지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우선 미납 등록금을 납부하고 나머지 돈을 가지고 동대문시장에 가서 천막을 샀다. 그리고 청계천변 덕수상고(현재 두산타워 쇼핑센터) 담장 너머 청계천 둑 빈자리에 천막을 쳤다. 천막 안 바닥은 판자로 깔고 석유곤로와 냄비 등 취사도구를 마련하여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학교는 중학교 1, 2, 3학년 각 한 반씩 편성되어 있었고, 모두 남녀공학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이수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지난 3년간을 쉬다가 입학한 상태였기에 처음에는 학업이 힘겨웠으나 수학을 제외하고는 별 어려움 없이 다른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학교생활에 익숙해지고 안정을 찾아 갔다. 낮에는 돈벌이를 위해 헤매었지만, 등교만 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학교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 중학교 1학년 때의 수학여행(남한산성)

내가 다니던 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교회에서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반 정규과목 외에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어 목사님 설교도 듣고 찬송가도 불렀다. 급우들 간의 관계도 날이 갈수록 친숙해졌고 학교에서 남한산성으로 소풍도 갔다. 음악시간에는 풍금소리에 맞추어 <즐거운 나의 집>, <들장미> 등의 노래도 배우고 쉬는 시간에는 탁구도 배웠다. 여학생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탁구도 치곤했다. 나는 비교적 친화력이 좋은 편이어서 같은 반 남녀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그런데 우리 반 여학생 중 ○○○란 학생이 있었다. 그는 외모가 단정하고 명랑했다. 그리고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급우들과도 잘 어울렸다. 비오는 날엔 하늘색 장화를 신고 왔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예뻐 보였다. 갓 피어난 장미꽃 같은 그의 얼굴을 바라만 보아도 황홀했다. 나는 다른 여학생들과는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우스갯소리도 하며 지냈는데 유독 그 학생만 보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문이 막혔다. 혼자 마음으로는 다음에 만나면 말을 걸어 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가도 막상 마주치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학교에 가는 것이 곧 그녀를 보기 위해 가는 것처럼 학교에서 그녀를 만나면 좋았다. 어쩌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날은 학교에 온 의미가 없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2학년이 되었다. 학교생활도 충실히 하여 학업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하였고, 돈벌이에도 열중하여 저축한 돈으로 구두닦이 생활을 접고 책장사를 시작했다. 소설, 잡지 등을 남대문, 청량리, 영천 등에 있는 책 도매상에 가서 사다가 오관수 다리 앞이나 덕수상고 정문(현재 두산타워) 앞 등에 펼쳐놓고 팔았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날이 갈수록 책이 팔리지 않아 도저히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생각 끝에 신문배달을 해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한국일보 장충동 지국에서 자리 하나를 얻어 배달을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신문 약 50부를 받아가지고 동화동, 문화동, 금호동을 거쳐 옥수동까지 뛰면서 배달을 마치면 오전 9시가 넘었다. 배달 구역은 넓어 힘이 많이 들면서도 독자 수가 많지 않아 배달료가 적어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지만 힘차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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