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희 법무법인 정동국제 대표변호사
우리나라 기업이 외국회사로부터 외국에서 중재를 제기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우리나라 기업은 그 중재 절차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방어하여야 하는 것이 원칙일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종종 중재를 신청한 외국 회사가 터무니 없는 증거를 내세웠을 경우, 우리나라 기업으로서는 안도하는 마음으로 방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사례는 중재를 신청한 측이 형사상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위법한 방법을 통하여 중재판정을 받은 경우이고, 우리나라 기업은 그런 위법성이 있으므로, 그 중재판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가 크게 낭패를 본 경우이다.

이 사안에서 우리나라 회사 동해펄프㈜는 미국의 마제스틱 우드 칩스 인크(“마제스틱”)라는 미국 회사와 사이에 마제스틱으로부터 펄프생산원료인 칩(나무조각)을 공급 받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한 관계이었다. 양 회사가 체결한 공급계약서는 독점공급권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는 등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대로 체결된 것이었음에 반하여, 이와 내용이 약간 다른 영문 공급계약서는 마제스틱의 요청에 의하여 형식적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와 무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칩의 공급 과정에서 양 당사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마제스틱은 뒤에 작성된 영문계약서에 의거하여 동해펄프를 상대로 싱가포르에서 ICC 중재를 제기하였다. 마제스틱은 증인들의 허위 증언을 내세우며 영문계약서가 진정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동해펄프는 그에 대하여 나름대로 방어를 하였다. 그러나 중재판정부는 마제스틱의 주장을 인정하여 동해펄프에게 거대한 금액의 지급을 명하는 중재판정을 내렸다. 이에 당황한 동해펄프는 허위 진술을 한 증인들에 대하여 위증 고소를 하고, 미국 회사의 주모자들에 대하여 사기죄 고소를 하여 위증죄 및 사기죄 모두에 관하여 우리나라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냈다.

이 정도의 사안이면, 동해펄프는 위 중재판정의 우리나라에서의 집행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저지할 수 없는 것으로 대법원이 최종 판단하였다. 동해펄프는 위와 같은 비위 사항은 뉴욕협약 제5조 제2항 (나)호, 즉 “중재판정의 승인이나 집행이 그 국가의 공공의 질서에 반하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뉴욕협약 제5조가 집행 거부사유를 제한적으로 열거하면서 중재인의 사실오인이나 법리오해 등은 집행 거부사유에서 제외하고 있는 점, 중재판정은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있으므로 기판력에 의하여 중재판정의 대상이 된 청구권의 존재는 이미 당사자 사이에 확정된 것인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집행국 법원이 집행 거부사유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하여 본안에서 판단된 실체적 사항에 관하여 다시 심리•판단하는 것은 예외적•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집행국 법원이 당해 외국중재판정의 편취 여부를 심리한다는 명목으로 실질적으로 중재인의 사실인정과 법률적용 등 실체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전면적으로 재심사한 후 그 외국중재판정이 사기적 방법에 의하여 편취되었다고 보아 집행을 거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고, 다만, 그 외국중재판정의 집행을 신청하는 당사자(이하 ‘신청당사자’라고 한다)가 중재절차에서 처벌받을 만한 사기적 행위를 하였다는 점이 명확한 증명력을 가진 객관적인 증거에 의하여 명백히 인정되고, 그 반대당사자가 과실 없이 신청당사자의 사기적인 행위를 알지 못하여 중재절차에서 이에 대하여 공격방어를 할 수 없었으며, 신청당사자의 사기적 행위가 중재판정의 쟁점과 중요한 관련이 있다는 요건이 모두 충족되는 경우에 한하여, 외국중재판정을 취소•정지하는 별도의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바로 당해 외국중재판정의 집행을 거부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09. 5. 28. 선고 2006다20290 판결).

즉, 대법원은 이 사안에서 비록 사기죄 및 위증죄의 확정판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위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대법원은 동해펄프가 허위 증인을 하는 사람들에 중재절차 내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재판정이 내려진 후에 다시 형사판결로 중재판정을 공격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취지로 본 것 같다. 여기에서 필자는 위 사건은 사안이 상당히 복잡하여서 충분히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과 대법원이 내린 판단 역시 완전히 명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모든 점을 차치하고라도, 위 대법원 판결의 사안은 우리나라 기업이 외국에서 중재를 제기 당하는 경우, 그 중재에서 총력을 다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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