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까지 배를 타면 어떤 기분일까? 지난 2월 10일, 2년 3개월 만에 재취항한 평택-리자오(日照) 카페리를 그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매개체일 것이다. 7월 18일부터 22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일조국제훼리의 ‘RIZHAO DONGFANG(이하 일조훼리)’ 카페리호를 타고 대륙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번 중국 여행은 운항이 중단된 지 2년 3개월 만에 재취항한 일조훼리를 타고 가는 것이라 기대감이 가득한 채 시작되었다. 흔들림 없는 편안한 카페리호로 유명한 선박인만큼 제대로 된 ‘배타고 떠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아드레날린 분출을 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번 4박 5일의 여정을 통해, 배에 대한 공포를 떨쳐냈고 중국에 대한 놀라움과 색다름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무서울 정도로 변해가고 성장하는 중국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대응을 세워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100㎞에 달하는 해변을 자랑하는 리자오(日照)와 중국 10대 물류중심지인 린이(臨沂)를 방문해 오감으로 체험한 모든 것을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치열하지만 여유로운 중국을 느끼며
배타고 떠난 여행 - 일조(日照)ㆍ임기(臨沂)

▲ 사람 냄새 가득한 활기 넘치는 ‘소도시’ 일조훼리

처음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설렌다. 일전에 타이완은 가본 적이 있지만 본토 대륙은 처음이라, 중국은 과연 어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참기 어려웠다. 출발 전날 이것저것 짐을 챙겼어도 재차 삼차 확인했던 것은 여행 전날의 흥분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잠을 설쳤지만, 전혀 피곤함을 느낄 수 없었던 것 역시 기자로서 취재를 위한 목적이었음에도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발시간은 12일 오후 3시였다. 설렘에 조금 이른 1시에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훼리 출항시간이 다가와서였을까. 터미널에는 승선을 기다리는 승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평택항의 모습에 국제훼리의 영향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일조훼리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승객은 한-중을 오가는 소상인(따이공)이라고 한다. 훼리 관계자는 운항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면 관광ㆍ여행객의 비중을 높일 계획이라고 했지만, 이미 일조훼리는 600여 소상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일조훼리는 편도 기준으로 17~19시간이 소요되는데, 고유가로 경제속도를 유지해 운항하기 때문에 18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관계자는 카페리는 정시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운항일정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조훼리가 파나마 국적이기 때문에 입항 과정에서 강제도선을 하고 있는데, 조만간 국적 전환을 통해 30분에서 1시간 정도 소요되는 도선시간을 줄이겠다고 한다. 운항시간이 줄어들면 더 빠르고 쾌적한 여행이 가능하리라 기대해 본다.

터미널에서 출국수속을 마친 후 셔틀버스를 타고 여객부두로 나가니 안정적이고 튼튼하기로 유명한 2만 5000톤급 일조훼리호가 늠름한 위상을 뽐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조훼리호는 640명 정원에 230teu를 실을 수 있는 용량을 갖추고 최대 24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묵직한 배가 최대 시속 45㎞의 속도로 황해를 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탑선 후 배정된 객실로 향했다. 객실은 디럭스룸으로 2인 1실의 침대방이었다. 두 개의 침대와 화장실, 자그마한 화장대, 긴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한 위성티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성급 호텔에는 비기지 못하겠지만, 안락하고 쾌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조훼리에는 군대 내무반같은 이코노미 객실부터 호텔 스위트룸에 버금가는 VIP룸까지 여러 형태의 객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소상인들의 치열한 삶을 느끼고 싶다면, 다인실에 머무는 것도 썩 나쁜 선택은 아닌 듯했다.

VIP룸과 로얄 스위트룸은 2명 정원으로 왕복시 각각 54만원(편도 30만원)과 28만 8천원(편도 16만원)이 책정되어 있다. 디럭스룸은 침대방과 다다미방을 선택할 수 있고 4~5인이 묵을 수 있다. 왕복운임은 25만2천원(편도 14만원)이다. 비지니스실과 이코노미실은 소상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객실로, 각각 6~18명, 9~39명이 묵을 수 있다. 왕복운임은 23만4천원(편도 13만원), 19만8천원(편도 11만원)이다. 책정된 가격을 그대로 내고 승선한다면 그것은 여행초보자일 것이다. 일조훼리에는 다양한 할인제도가 마련되어 있어 10~30%의 운임할인을 받을 수 있으니 꼭 확인하시라.

승선 후 기자 신분을 적극 활용하여, 일반 여객은 출입할 수 없는 기관실과 47명의 승무원이 생활하는 승무원실, 선상을 둘러볼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배는 작은 도시와도 같았다. 기관실이 관공서라면 승무원실은 공무원 기숙사랄까. 1층 객실은 소상인의 삶의 터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마치 오일장이 열린 듯 분주한 분위기는 소상인들의 치열한 삶을 대변했다. 길게는 몇 년을 배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한 번의 운항으로 손에 쥐는 돈은 5만원 남짓.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 배에서 낭만을 느끼고자 하는 여행객들은 눈살을 찌푸릴 지도 모르지만, 이들의 치열한 삶을 이해하며 서로 공존하는 것도 일조훼리에서 느낄 수 있는 풍경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직 10살에 불과한 젊은 배이니만큼 시설은 깔끔하면서도 기능적이었다. 편의점, 선내 면세점, 노래방, 골프연습실과 배드민턴장 등의 체육시설, 주점 등 긴 항해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각종 편의시설과 병원, 구명보트, 구명조끼 등 안전을 위한 장치까지 잘 마련되어 있었다. 다인실 승객을 위한 샤워실과 사우나실도 갖춰져 있지만, 주로 소상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관계로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일조훼리가 분주한 평택항을 벗어나자, 황해의 자랑인 서해대교가 한 눈에 들어왔다. 서해대교 옆에는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철강중심지 당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염을 줄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돔 야적장들을 보면서, 저게 야구장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그리 생산적이지 못한 감회가 떠오르기도 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배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금세 심한 허기가 찾아왔다. 쾌속선보다 월등히 편한 승선감으로 멀미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선상식은 한국식으로 마련되었는데, 느끼하기로는 최고인 중국식을 일단 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 속에서 한국인 조리장이 만들어준 맛있는 저녁을 음미할 수 있었다.

600여명에 달하는 승객이 한정된 식당 공간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일조훼리와 소상인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일조훼리는 일반 승객을 위해 일반인과 소상인의 식사 시간을 따로 정해 놓고 있었고, 소상인들 역시 일조훼리의 정책에 잘 수긍하여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조훼리는 이제 취항 6개월에 접어들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안정화가 시급한 시점이다. 일조훼리의 안정화에 소상인들이 크게 기여하고 있고, 일조훼리 역시 소상인들에게 할인된 운임을 제공하면서 윈-윈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을 마치고 숙소에서 가볍게 샤워를 마쳤다. 욕실은 이곳이 배 안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사용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따뜻한 물이 안 나오면 어쩌나, 수압이 약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샤워를 마치고 식당 옆에 자리한 호프에서 가볍게 칭다오 맥주를 들이켰다. 개운하게 샤워를 끝내고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은 아마도 글만 보고도 느낄 수 있으리라.

술을 깰 겸 찾아간 갑판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망망대해를 외로이 운항하는 일조훼리에서 맞는 바닷바람의 시원함은 세상의 그 어떤 현학적인 문구로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배 타고 떠나는 여행의 진수가 아니겠는가. 일조훼리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의 중국

리자오의 아침은 안개가 가득했다. 과연 매년 여름 안개가 심한 산둥반도에 도착했음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산둥반도의 안개는 여행객에게는 신비로움과 낭만을 주지만, 해운업계에는 큰 고충 중의 하나이다. 안개로 운항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장일단이 있다는 격언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선하여 밟은 땅은 말 그대로 대륙이었다. 난생 처음 밟는 중국 땅에 감개가 무량하기도 잠시, 서둘러 버스에 탑승해 입국 수속을 밟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시멘트, 석탄 등 광물 화물이 많은 항만 특성답게 여기저기 흙더미가 산재해 있었다. 리자오시는 총 면적 5310㎢로 280만 명이 거주하는 산둥성 최남단 지역이다. 햇빛이 가장 먼저 비추는 지역이라 하여 ‘日照’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는데, 총 길이 100㎞에 달하는 해안선으로 유명한 곳이다. 시멘트, 석재, 녹차 등이 주요 산업으로, 평택-리자오 훼리 취항으로 지역경제가 크게 발전했다고 한다. 운항사 문제로 훼리 운항이 멈췄을 때, 훼리호 재취항을 위해 리자오시에서 많은 노력을 한 것은 국제해운노선이 가지는 막대한 영향력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리자오시는 항만 및 해양관광 인프라 덕분에 최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상전벽해가 정확히 들어맞는 곳으로 2003년에는 'China Top Tourist City'로 선정된바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 지겨울 정도로 비를 봤는데 중국에 와서까지 비를 보다니, 비와의 인연은 참 깊고 진했다. 비를 피해 터미널에 도착해 수속절차를 밟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수속직원의 모습에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급상승하기도 했다. ‘니하오’라며 반갑게 맞아주는 수속직원의 인사에 중국, 특히 공안에 대한 이유 없는 공포는 금시에 사라졌다.

긴 장거리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아직 중국 현지식을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곳은 한국식당인 ‘설악정’이었다. 한국음식으로 워밍업을 한 후 본격적으로 중국음식에 도전하기로 했다. 점심을 마치고 린이시로 향했다.

린이시는 리자오시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린이시는 1만 7000㎢의 면적에 1142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의 물류 중심지이다. 마늘, 은행 등 농산품로도 유명하지만, 200여개의 도매시장이 형성된 중국 10대 물류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5만여 상점에서 4만 여개의 상품을 취급하고, 관련 종사자만 20만 명에 달할 정도이고, 2008년 기준으로 1000억 위엔(16조원)의 교역량으로 린이시 GDP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는 내수 위주의 시장만이 형성되어 있는데, 린이시에서는 장차 국제 물류도시로 성장하려는 의지가 강해, 우리 기업들이 진출을 적극 모색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여행은 단지 풍경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행지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알아봄으로써 웃고 즐기고 떠드는 여행을 넘어서 깨닫고 고민할 수 있는 여행을 만들어 가는 것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인류사 태동과 동시에 나온 명언이 있다. “세상사는 누구도 모른다.” 린이시의 물류시장 방문을 계기로 장차 한중을 오가는 무역회사의 대표가 되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조용하고 너른 농촌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도 잠시, 린이시 도심에 진입하자 무수한 고층빌딩 숲이 눈앞에 나타났다. 빌딩 숲은 린이 신구(新區)로 새롭게 거듭나는 린이시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한창 건설 중인지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엄청난 건설열기는 신도시가 완성되었을 때를 사뭇 기대하게 만들었다.


▲ ‘Made in China’의 위력을 느끼다

린이시에 도착해 처음 방문한 곳은 린이국제물류전시관이었다. 린이시에서 취급하는 각종 상품, 린이시에 위치한 도매시장을 홍보하는 곳으로 린이시 물류시장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여느 컨벤션센터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전시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 직원의 열정적인 모습에 중국 10대 물류중심지라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인근에 자리한 소상품시장을 찾아갔다. 마치 용산전자상가 같은 분위기를 품기는 소상품시장에는 세계의 굴뚝이라는 중국의 10대 물류중심지답게 다양한 상품이 집결되어 있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가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지기 전에 이곳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동대문시장 같은 분주함과 치열함은 보이지 않았지만, 큰 규모의 건물에 빼곡 들어차 있는 상점들을 보며, 왜 세계 어디를 가든 ‘메이드 인 차이나’를 볼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소상품시장 옆에는 물류기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각 건물 기둥마다 중국 전역의 지명이 쓰여 있었다. 한 개의 성이 우리나라만한 크기인 중국에서 각 성의 주요도시에 상품이 운송된다고 생각해보라. 중국 물류시장의 규모와 성장 가능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수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의 집적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수출물량까지 취급했을 때 커질 규모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현재와 미래의 힘이 아닐까 싶다.

린이시 물류단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나니, 저녁을 먹기까지 약간의 짬이 생겼다. 중국의 또 하나의 자랑 발마사지를 받으며 피로를 풀기로 했다. 한국에도 많은 발마사지 업소가 있지만,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터라 기대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린이는 관광지로서 알려진 곳이 아니었기에, 발마사지 업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힘들게 발마사지업소를 찾아 입성했을 땐 피로가 누적될 대로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피로감도 한 순간, 처음 받아본 발마사지는 그간의 피로를 말끔히 씻겨주었다. 다만, 명심해야할 것은 발마사지 후 꼭 발을 말끔히 닦고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에 묻은 크림 때문에 호텔에 가서 씻을 때까지 느껴야했던 찝찝함은 날라간 피로를 다시 불러오게 할 정도였다.

린이시에서의 저녁은 중국 현지식이었다.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관계로 준비된 음식이 빠르게 나와 무엇을 먼저 먹어야할지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원탁의 테이블에 앉아 음식판 돌려가며 여유롭게 새로운 음식을 맛보리란 기대는 꿈꾸기도 전에 사라졌다. 쌓인 음식이 2층을 이룰 정도였으니 고문에 비길쏘냐.

정신이 없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음식 특유의 느끼함이었다. 가이드의 사전경고로 각오는 했지만, 실제 상황은 참혹했다. 술을 절로 부르는 느끼함, 중국 음식이 가진 매력이라 할 수 있을까. 멀쩡해 보이는 음식도 입에만 들어가면 고깃집 불판을 닦는 비계덩어리를 자연스레 떠올릴 정도였으니, 과연 용기 있는 자만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라 평하고 싶다. 보기엔 혐오음식인 매미튀김이 제일 맛있었을 정도이니, 글로벌 인재가 되기 위해 가열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각오를 가슴 속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 날 이후로, 중국 현지식은 더 이상 찾지 않기로 다짐했다.

린이에서는 블루호라이즌 호텔에 묵었다. 린이시 구도심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쾌적하고 안락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글로벌한 아침 뷔페를 제공하고 있어 음식에 대한 공포를 해소시켜준 것이 맘에 들었다. 신선한 우유와 과일에 갓 구운 빵을 곁들어 먹고, 모닝커피 한잔 마셨을 때의 상쾌한 기분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 중화라는 자부심,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어느덧 3일차 해가 떴다. 오전까지 린이시 견학을 마치고 오후에는 리자오로 이동하기로 했다. 첫 방문지는 린이시 도시계획전람관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람관의 전경에 규모에 집착하는 키치적 취향이 느껴졌다. 우리나라 산업화시기에 건설된 세종문화회관, 국회의사당, 한국방송공사 등의 건물에서 느낄 수 있던 규모에 대한 집착, 대중을 압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한창 개발의 붐이 일고 있는 중국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 씁쓸하기도 했다.

도시계획전람관은 내부도 화려했다. 전시내용은 전날 방문했던 물류전시관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에 화려함과 웅장함을 더한 곳이었다. 지금의 우리나라였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아마도 전시행정, 예산낭비 등의 지적이 지속적으로 나왔을 것이다.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중국이 가지는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중국은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 주목되기에, 중국의 미래를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


▲ 공자의 고향 곡부, 문화혁명의 시름을 이겨내다

린이시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리자오시 인근에 자리한 곡부로 향했다. 시 중심이 발전하는 중국의 미래를 보여준다면, 시 외각은 중국의 과거를 보여주었다. 벽돌문화가 발달한 중국답게 벽돌로 지어진 슬레이트 지붕집과 드넓은 밭. 오밀조밀하여 안락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우리나라의 농촌의 풍경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 끝없이 펼쳐졌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광활한 대지를 보며, 왜 중국을 ‘대륙’이라 하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수확한 농산품이 우리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곡부는 공자의 고향으로 공자의 무덤인 공묘, 공자 가족의 묘지인 공림, 그리고 공자 후손들이 살던 공부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곳으로 산둥지방의 관광명소이자 자랑이다. 중국 남부 사람들이 ‘남부엔 많은 기인이사가 있다’고 자랑하면 산둥사람들은 ‘산동엔 한명의 천재가 있다’고 답한다고 한다. 바로 그 한명의 천재가 바로 동북아시아 문화권을 만든 공자이다. 그래서 곡부는 산둥 지방의 자랑이다. 린이엔 또 하나의 천재가 태어났으니, 그는 제갈량이었다.

공자의 숨결이 살아있는 곡부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탈 유교사상 운동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상당수 많은 문화재들이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되었는데, 문화재 파괴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바로 공묘의 바로 옆에 있던 곡부사범대학 학생들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또한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 중국정부에서 수립한 개발제한 정책으로 인해 개발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어 지역민들은 불만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라 한다.

곡부는 성벽을 기준으로 내성과 외성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공씨 가문과 관련이 있거나 공직에 몸담고 있던 상류층이 살던 사는 내성지역은 현재 완전한 개발제한 정책으로 2층을 초과하는 건물을 건립할 수 없게 되어있는데 비해, 중하층민들이 거주하던 외성지역은 어느 정도 개발이 진행되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여 양 지역의 위치 역전의 변화가 흥미로웠다. 홍예문을 경계로 신식 건물이 들어선 일본인 거주지역과 초가집이 즐비한 한국인 거주지역이 나뉘었던 개항시기의 인천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 공자는 황제의 반열에 올라섰다

공묘는 공자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으로 노(魯)나라 시기에 처음 세워진 이후 확장을 거듭해 청대에 현재의 규모에 이르렀다. 거리는 남북이 1120m, 동서가 140m, 면적은 약 10만㎡나 되는 거대한 건축군으로 규모만큼 화려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공묘는 숫자 9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겹 묘당에 9줄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중앙의 대성전 전면에는 용이 조각된 용주(龍柱)가 그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숫자9와 용은 전통적으로 황제가 사용할 수 있는 권위의 상징으로, 공자가 이미 황제급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자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을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특히 대성전 전면 용주는 그 조각의 화려함이 너무 뛰어나 황제가 공묘에 참배하러 왔을 시 질시를 피하기 위해 붉은 천으로 가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 이외에도 많은 비석들,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정원수 하나, 계단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다만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비석들이 파괴되었다고 하니 정치논리에 따른 어두운 과거가 아쉬움을 남겼다.

5만㎡규모에 장원으로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공부는 약 500여칸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면의 집무실과 후면의 생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청시대의 황실과 버금갈 만큼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전면에 집무실이 위치해 있으며 좌측에는 가족묘가, 우측에는 공부하는 학당이 마련되어 있다. 맨 후면에는 내실이 위치해 있는데 명, 청 시대에는 이 후원에 7세 이상의 남자가 발을 들이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내실로 들어가는 길은 매우 협소한데 우선 공부의 여인들이 이 길을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몸매를 유지할 것을 당부하기 위함과, 외인이 침입했을 시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공자의 후손들은 중국의 4대 명문가로 명성을 누렸는데 이러한 생활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공자의 75대 직손인 공상희(孔祥熙)는 미국 예일대 유학파 출신으로 남경정부 공상부장(工商部將), 중앙은행 총재 등을 지내는 등 근대 중국의 엘리트였다. 쑨원의 혁명운동에 동참했으며 차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의 2인자 자리까지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남경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자 중국 본토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공상희는 장개석 정권에서 지주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형적인 관료자본가로 평가 받는 등 공산화된 중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상희의 아내는 송애령(宋靄齡)으로 장개석의 아내인 송미령과 자매간이다. 이 같은 이유로 현재 생존하고 있는 공자의 76대 직손 공덕성은 대만에 거주하고 있으며 공부는 주인은 없이 객들만이 가득 채우고 있는 상황이다.

공묘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세계 최대, 최고의 씨족묘인 공림은 2만㎡규모에 약 10만 여개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묘지에 입묘할 수 있는 사람은 공씨 성을 가진 남자로 제한되어 있으며, 공씨 성을 가진 여성과, 공씨가문에 시집온 여성은 입묘할 수 없다고 한다. 당나라 때 공자가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봉됨에 따라 공자의 묘는 왕릉이 되어 있으며 비석에는 大成至聖文宣王墓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황제가 참배할시 격이 낮은 왕에게 참배한다 하여 분노를 살까봐 후손들이 커다란 돌로 왕(王)자의 맨 밑변을 가려 간(干)자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 곡부에서 杏壇聖夢은 봐야 한다.

곡부를 간단히 보고 서둘러 일조로 가려고 했지만,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곡부 외곽 행단극장(杏壇劇場)에 행단성몽(杏壇聖夢) 공연을 봐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행단성몽은 공자의 사상인 인(仁)을 소재로 인류가 모두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자는 주제의 집단 무용극인데 200~300명의 대인원이 출연하는 거대한 공연으로 곡부에 오면 꼭 봐야 하는 필수 코스라는 가이드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행단 극장은 야외극장으로 약 1000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극장이었다. 야외극장의 특성상 우천 시나 동절기에는 공연을 안 하는데 운 좋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무대는 200여명이 동시에 올라설 수 있을 만큼 거대했는데 조명시설이 잘 되어 있었으며 음향시설도 수준급이었다. 무대 양측에 위치한 대형 멀티비전에는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로 설명이 나와 공연의 순서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공연은 실로 훌륭했다. 공자의 사상을 어떻게 표현한 것인지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화려한 조명과 함께 쉴 사이 없이 진행되는 공연은 웅장하며 아름다웠다. 집단체조와 기예. 화려한 소품, 역동적인 율동 등의 화려함과 이를 뒷받침하는 웅장한 음악 및 조명에 결국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이라 해도 허름한 도시의 모습에 어느 정도 편견도 없지 않았지만, 가장 훌륭한 관광 인프라는 문화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입장료는 약 80위안으로 중국 노동자 평균 임금의 1/10이나 하는 비싼 가격이지만 그 만한 가치가 있는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강력추천!


▲ 태산, 하늘 아래 뫼일 뿐

산둥성에는 중국 최초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주인공 태산이 그것이다. 태산은 산둥 오악(五嶽)중 하나로 곡부에서 약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태산에는 명물 7412계단이 있다. 7412개의 계단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땀방울 흘려야 했을까. 계단, 돌길 모두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만들었다 하니, 태산이 높다하되 중국 인민 앞에 뫼이로다.

빠듯한 일정으로 아쉽게도 태산에 오르진 못했다. 일조훼리를 이용한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사 관계자는 태산과 무당산을 찾으려는 관광객의 반응이 뜨겁다고 전했다. 배에서 차분하게 휴식을 취하고 중국의 명산을 밟는 체험도 꽤나 매력적일 것이다.

태산은 특이하게 케이블카를 타는 승강장까지 일반 차량이 올라갈 수 없게 되어 있다. 즉 산 입구 주차장에서 태산관리관청이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승강장까지 이동한 이후 케이블카를 탑승하는 시스템이다. 케이블카는 4인이 탈 수 있는 곤도라로 비바람이 불 땐 마치 어트랙션을 타는 듯한 스릴이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산 정상까지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여름에는 산둥반도의 안개로 묘한 운치를 느낄 수 있다고 하니, 반드시 태산 정상에서 안개를 가르는 메아리를 외쳐야 할 것이다.


▲ 해변의 풍경, 리자오에 취하다

곡부를 떠나 리자오에 도착하니 이미 땅거미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저녁을 마치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리자오시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어두운 밤거리를 돌아다닐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실은 의사소통의 장애가 기자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의 모습을 오감으로 체험하면서 중국어 습득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3일차 하루가 지나갔다.

항구 도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대형 화물차가 분주히 움직이고 대형 컨테이너 선박이 드나드는 항구도시와 입항한 선박에서 내린 사람들이 시민과 해후하고 어울리는 항구 도시가 그것이다. 어느 모습에서 사람 사는 향기가 느껴지는가?

리자오시는 사람 중심의 항으로 거듭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친수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100㎞에 달하는 긴 해변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을 활용해 거대한 화물차가 몰려다니는 삭막한 공간이 아닌, 사람이 몰려있는 화기애애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에서는 집단행동은 피해야한다. 몇 명이 몰려 있어도 공안이 다가오는 중국 사회에서 해안가 공원에는 수천, 수만 명이 몰려 있어도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친수공간이 가지는 위력이다.

고운 하얀 모래사징이 장장 60km나 펼쳐진 중국의 3대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만평구해안관광구는 리자오시의 명물로 아침 일찍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야경 또한 뛰어나 시원한 칭다오 맥주 한 캔 들고 해변을 거닐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중국 휴가시즌을 맞이해 관광구에는 많은 시민들이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여름에는 휴가를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피서객이 온다고 하는데 향후 천혜의 해수욕장을 지원할 수 있는 배후 관광단지 개발을 완료 한다면 최상급의 관광지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항만도시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개발도상국 시절의 우리 모습이라며 한 단계 아래로 봤지만, 중국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새 건물마다 설치된 태양광 발전시설과 녹색도시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나무와 공원은 과연 중국이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보여줄지 기대를 갖기 충분했다. 최근 중국 정부는 리자오시를 중추관광도시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다시 찾아온다면 리자오시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기대되는 바이다.

만평구해안관광구를 떠나 리자오 중심부로 이동했다. 리자오시는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도시로 관광객을 위한 쇼핑 여건이 잘 갖춰져 있지는 않다. 시내 백화점은 우리나라의 오래된 중소규모 백화점 정도였다. 백화점 옆에는 리자오시 유일의 이른바 ‘짝퉁’상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독점이다 보니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청도에 비하면 상품의 가격이 비싼 편이다. 명품을 갖춘 사람보다는 명품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속에 리자오와의 작별을 준비했다.

여느 관광지마다 볼 수 있는 소수민족 공연을 리자오에서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리자오시에서 30분 거리에 죽동천(竹洞天) 숲이 있다. 40위엔으로 상쾌한 대나무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는 장족의 전통공연이 있는데, 더운데 고생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 여유로움 속에서 치열한 삶을 느끼다

리자오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다시 일조훼리에 승선했다. 다시 만난 일조훼리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 아쉬움도 컸다. 체험은 한 사람을 형성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한다. 역사학에서 인물의 일대기를 연구하는 이유는 바로 체험이 그 사람을 어떻게 변모시켰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정을 통해 얻은 체험은 기자에게 많은 숙제를 안겨주었다. 한국을 흔히 다이내믹하다고들 한다. 그만큼 한국인이 역동적이고 적극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중국의 놀라운 발전을 보면서 위축되기보다, 더욱 다이내믹한 대응으로 중국의 공세를 이겨낼 능력이 우리에겐 충분히 있다고 본다.

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다른 여행과 무척 다르다. 왕복 이틀을 배에서 보내야 하는 만큼 행선지에서는 일정에 쫓길 수도 있다. 그러나 배에서만큼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힘들게 왜 이틀씩 배에서 시간을 보내느냐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여행의 참 의미가 무엇이냐고. 치열한 삶을 잠시 내려놓고 맘껏 여유를 즐기며 쌓은 피로를 푸는 것, 그것이 여행의 참 의미가 아니겠는가.

기나긴 항해 시간동안 선상에 앉아 묵묵히 서예 삼매경에 빠진 한 중국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동안 너무 바쁘게만, 시간에 쫓기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 중국인도 배에서 내리면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배에서의 유유자적함은 우리의 삶을 성찰할 시간으로 다가왔다. 배 타고 떠나는 여행, 우리에겐 많은 것을 전해준다. 한번 경험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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