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우리나라 대통령들(1)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元首)이며(헌법 제66조 1항)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로 선출(헌법 제67조 1항)됨으로 모든 국민과 관계가 깊지만 특히 우리 공직자에게는 대통령이 정부의 수반으로서(한법 제66조 4항) 모든 주요행정 업무를 지휘하므로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은 공직자와 불가분의 관계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공직에 전념해온 사람으로서 그동안 겪어온 역대 대통령에 대하여 소회(所懷)의 일단을 피력하고자 한다. 다만 위에서 이미 언급한 이승만, 윤보선 등 전 대통령에 대하여는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재론하지 않기로 한다.

대통령 박정희(朴正熙)(1917. 11. 4~1979. 10. 26)

1979년 10월 26일 당시 인천에서 근무하던 나는 군산지방해운항만청으로 출장을 가게 됐다. 아침 6시 여관에서 일어나 라디오를 켜니 믿기 어려운 충격적인 뉴스가 흘러 나왔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의 심복인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간에 총격사건이 벌어져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부상당한 듯하다는 것이다.

당시는 유신치하에서 공화당국회가 김영삼 야당(신민당) 총재를 제명, 의원직을 박탈하고 이에 격분한 부산·마산 대학생 등이 데모를 일으켜 국민여론이 악화되어 정국이 긴장상태에 휩싸였을 때였다. 뉴스는 이어서 이 총격으로 박대통령이 서거하고 차지철을 비롯한 경호실 요원들이 피살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결국 부마항쟁 처리를 놓고 벌어진 강경파 차지철과 온건파 김재규의 갈등 끝에 독재자 박정희는 오랜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는 위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 있지만 어쨌든 그 시대 13년 동안 공직생활을 해온 감회로는 착잡했다. 좋은 세계에서 영면하기를 빈다.

대통령 최규하(崔圭夏)(1919. 7. 16~2006. 10. 22)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37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 만주 국립대동학원을 졸업하였다.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 외무부 통상국장, 주일대표부 공사, 외무부차관을 역임하고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됐다. 그는 1976년 3월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선출됐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당시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직무대행으로서 권력을 이양 받았다.

10월 27일 새벽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그는 박정희 피살사건의 조속한 수사를 명령하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10월 26일자로 소급 해임했다. 육군대장 정승화가 계엄사령부 사령관이 되었고, 육군소장 전두환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최규하는 비상조치를 해제하면서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새 정부 출범을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과 뜻을 같이 하는 군내 파벌이 군사반란을 일으켜(12·12 사태) 결국 이들 신군부의 뜻대로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고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대학교 휴교령, 정치활동금지, 언론 사전검열 등이 포함된 계엄포고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5월 18일 오전 신군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등을 군병력으로 점거해 폐쇄했고, 야당 지도자 김대중 등을 체포하여 자택에 감금했으며, 이어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 이철승, 이민우, 유치송을 감금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처참하게 진압한 신군부는 사전 계획대로 국가보위비상대책 위원회를 만들어 내각을 조정 통제하여 사실상 정권을 접수했다.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김정렬을 보내 대통령직 사임을 권유하여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퇴했고 최규하 정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국민을 실망시킨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 자체가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방식으로 선출되었고, 대통령에 올랐지만 서울의 봄 이후 정국향방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국민과의 대화는 전혀 없었다. 또 민주적 절차에 의한 새 정부출범 약속을 지키지도 못했고, 하극상 군부를 장악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군부에 반항하거나 집권군부와 과감히 결별하지도 못했다. 그저 자신의 보신행보만을 계속하다가 결국 퇴출되었고, 퇴출 후에도 아무런 납득할 만한 태도도 보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낡은 고무신을 남기고 서거했다고 하나 그것이 국민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일까? 가장 유감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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