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우리나라 대통령들(2)

대통령 전두환(全斗煥)(1931. 1. 18~ )

인천해운항만청 당직실 TV에서 본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10·26사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대머리의 육군소장 전두환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 씨를 중심으로 국민들은 이제는 헌법을 개정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자유롭게 선출하여 새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과도기 최규하 대통령 치하에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한 후 정국진전 없이 지리한 헌법 개정 논쟁이 계속되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 구금함으로써 12·12사태가 일어났다. 다음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나 유혈진압함으로써 전두환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는 1980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듬해 2월 25일 개정헌법에 따라 간접선거에 의한 7년 임기의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자유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끊임없는 저항에 부닥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강권으로 이를 억누르며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하였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항쟁인 국민저항에 부닥쳐 임기만료 시 직선제 개헌을 통하여 제6공화국에 정권을 이양하였다.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화의 꿈에 부풀었던 국민들의 열망을 무자비하게 짓누르고 비민주적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강권통치를 자행한 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행위였다. 그러나 행정·경제 면에서는 재임 중 커다란 물의가 없었다고 생각되며 혼란기를 수습하여 국가존립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장기집권을 획책하지 않고 정권을 이양한 점은 불행 중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대통령 노태우(盧泰愚)(1932. 12. 4~ )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재직 시 우유부단하다하여 권위주의 대통령이라는 비난과 물태우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지만 그는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룬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특수전학교 대인심리전 과정을 수료했다. 1968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사단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1974년 준장으로 진급, 공수특전여단장, 1978년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초에 제9사단장으로 부임, 10·26사태로 유신정권이 붕괴한 뒤 전두환 소장이 주도한 신군부세력에 동참, 12·12사태에서 군지휘권을 장악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수도경비사령관을 거쳐 1980년 중장으로 진급, 국군보안사령관을 지냈다.

1981년 7월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후 전두환 정부 외교안보담당 정무 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냈으며, 1983~ 1986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1984~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조직위원장을 맡았다.
1985년 민주정의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1987년까지 당 대표위원으로 지냈다. 이후 1987년 6월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의 시국수습방안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김영삼·김대중 후보들을 물리치고 당선, 1988년 2월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8년 9월 공산권을 포함해 160개국이 참가한 서울올림픽대회를 개최하였고, 1990년 10월 한·소 간 국교수립, 1992년 8월 한·중 간 국교수립을 이루어 냄으로써 우리나라의 위상을 명실상부한 세계국가로 높인 대통령으로 생각된다.

저자가 1988년 12월 31일 국가사회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1990년 9월 24일 서기관으로 승진하면서 대통령 명의의 승진임용장을 수령한 것도 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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