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노무현(盧武鉉)(1946. 8. 6~2009. 5. 23)

노무현 대통령은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의로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후 그는 제5공화국 비리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대하여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면서 국민의 주목을 끌었다.

1999년 내가 마산지방해양수산청장 재임 시 대면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한일어업협정에 대한 어민들의 비난여론에 관심을 보였고, 관내 관계기관장과 어민대표들을 만나 의견을 청취하는 등 대민 활동을 할 때였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인 1999년 5월 31일 우리 마산해양수산청 주관으로 마산항 제5부두(귀곡부두)에서 개최한 제4회 바다의 날 기념행사에 초대되어 김종필 국무총리와 정상천 해양수산부장관, 저자 등과 함께 대회를 참관하기도 했다.

내가 마산청장직에서 명예퇴임 후, 한국컨테이너 부두공단 관리본부장 재임 시에는 해양수산부장관이 되어 부산지역 초도순시 시 우리 공단을 내방, 임원진과 기념촬영도 했다.

노무현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을 거쳐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통합민주당 제16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고, 이어 국민통합 21 정몽준과 후보단일화를 이루어 단일후보가 되었다.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선거운동을 펼쳤다. 동년 12월 9일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중 48.91%(1201만 4277표)를 얻어 46.59%(1144만 3297표)를 얻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참여정부를 표방한 그는 고질적인 지역주의 청산과 권위주의 타파를 위하여 노력했다.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으며 2007년 10월 4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 군사분계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10·4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 측근비리, 위헌적인 신행정수도 이전 추진, 계속적인 돌출발언, 유력일간 신문사들을 비롯한 언론과의 지나친 마찰, 퇴임 시 대통령 재임 시의 기록물 복사본 유출 등으로 국민들의 극심한 비난을 받아왔다.

2008년 2월 24일 퇴임 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로 귀농하여 활발한 전원생활을 즐기는 듯 했으나 남북관계 등 현실정치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폄하발언 등으로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종래에는 친형, 부인, 아들, 딸 등의 비리 연루의혹 등이 불거져 도덕성에 대한 상처를 입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게 되고 2009년 5월 23일 부인의 재차 소환날짜에 이르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나는 그분의 죽음에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남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남다른 행보를 보였고, 또 항상 떳떳했던 그가 법의 심판을 외면하고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직무 책임을 끝까지 지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나 그 개인을 위해서나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여러 차례 공·사로 대면하였던 분이고 이 나라를 위하여 봉사한 대통령이었던 그의 영면을 빈다.

대통령 이명박(李明博)(1941. 12. 19~ )

내가 이명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고려대 재학시절이었다. 그는 1961년 입학 동기로 나는 법대 법학과 그는 상대 경영학과였다.

이명박은 재학시절부터 여러 면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상대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직무 대행을 역임하고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한 6·3학생운동에 앞장섰다. 이런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었을 정도다.

졸업 후 현대건설에 입사한 후 초특급으로 승진하여 1977년 35세의 나이로 사장이 되었고, 1988년에 회장이 되었다. 이를 보며 대학재학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의 탁월한 역량과 성실성이 회사로 부터 인정받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는 14·15대 국회의원을 거쳐 32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어 청계고가 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하였으며, 서울시의 대중교통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면서 수많은 어려운 고비를 끈질긴 대화와 설득으로 이루어냈다.

서울시 한복판에서 시원한 냇물과 물풀 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보며, 싼 버스요금으로 복잡한 서울시가지를 시원스럽게 달릴 수 있는 것이 MB(이명박의 약칭)의 덕분이라는 말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울시장 당시, 그리고 퇴임 후 대통령 후보 물망 시 교우(동창)들의 모임인 고려대 언론인 교우회(나는 공보담당관 경력으로 항상 초대받았음) 등에서 만난 그는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어 악수를 교환하여 친밀감을 주었다.

그런 그가 혹독한 한나라당 당내 경선을 치르면서도 의연한 자세를 보여 마음이 놓였다. 주위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비평해도 나는 기대를 저버릴 사람이 아닐 거라고 굳세게 대변(代辯)했다.

역시 많은 표차로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 회의장에서 개최된 고려대학교 61학번 교우회에 참석하여 “나는 영원한 고대 61학번 교우”라고 화답했을 때 한없는 자부심과 고마움을 느꼈다.

200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 이후, 급하고 필요한 곳에 항상 제일 먼저 나타나 국민에게 힘을 주며 나아갈 길을 가리키고 아시아, 그리고 세계에 앞장서는 것을 볼 때, 나의 기대와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본다.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경제위기를 극복할 것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우리나라가 G20의 의장국이 된 것도 세계인에게 보여준 그의 성실성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평생 노력으로 모은 전 재산을 후진양성을 위하여 아낌없이 국가와 사회에 헌납한 그의 봉사정신에도 깊은 경의를 갖는다.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초심을 잃지 말고 역량을 다해 봉사함으로써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남북통일과 세계평화에 큰 업적을 쌓고, 자신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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