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기니 정글을 떠도는 혼령들

▲ 위령제 때 인연을 맺었던 뉴기니의 까리타스 수녀님들이 빈민촌 봉사를 하고 있다. 금년에도 ‘우리 수녀원에서 6명의 사제들이 주례하는 형님의 기일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리라 믿습니다"라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언제쯤일까? 곰곰이 계산해보면 내 나이 네 살쯤이었다. 그러니 70년이 지났는데도 어쩜 그 장면이 이렇게 생생할까?

내가 형님을 찾아 엽연초경작조합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형님은 날 번쩍 들어 껴안고는 빵집으로 가, 빵과 과자를 사서 어머니에게로 갔다. 어머니는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목화를 따고 있었다. 언덕에서 날 가운데 두고 어머니와 형님이 나란히 앉아 목화밭을 바라보며 빵과 과자를 먹었다.

그 정경이 형님이 나에게 남겨둔 유일한 기억이고 추억이다.

내가 너무나 어려, 어머니와 형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지금 짐작건대 아마도 “너를 전쟁터에 보내놓고 내가 어찌 살고!”, “전쟁에 간다고 다 죽겠어요. 제가 꼭 살아 돌아올 께요”란 대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형님은 조선인지원병훈련소에 입영했다. 스스로 자원했다 하여 지원병이라 했지만 사실은 강제징집이었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이란 당치도 않는 명분을 내세워 회유하고 협박하며 젊은이들이 입영토록 했다. 형님은 6개월 훈련을 받고 부산항에서 남양군도로 떠났다.

일제가 진주만 기습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세계해전역사에서 유례없는 대병력을 동원해 미드웨이를 공격했으나 미국의 역공에 패퇴했다. 이어 솔로몬과 과달카날 전쟁에서도 연패해 항복으로 치달았다.

이와 별도로, 일제는 뉴기니에도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맥아더 남서태평양사령관을 격퇴하기 위해 뉴기니 알프스라는 4천m의 스턴레이산맥을 넘어야했다. 보급이 끊겨 첩첩 정글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풍토병 등으로 16만 명이 전사했다. 미군 선봉대장은 “일본 야전병원의 참상을 표현할 수 없다. 수많은 시체들이 방치된 채 부패됐다. 겨우 목숨만 붙은 병사들이 아사 직전의 벌레들처럼 꿈틀거렸다. 그 참상에 몸서리쳤다”라고 기술했다.

그런 참상도 모르고 어머니는 새벽 4시면 정화수를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제 아들 살아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지극정성으로 빌었다. 한겨울엔 찬물에 머리를 감아 머리칼에 고드름을 달고서 빌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온다고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그러나 형님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가슴은 숯검정이 되어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형님의 생사확인에 나섰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협회와 정부기록보존소를 오고가며 '1943년 1월 30일 노고부에서 전사'라는 형님의 사망을 확인했다. 한일협정 때,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전사자 명단을 접수하고도 유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런 한심한 작태가 세상에 또 있으랴!

형님 제사를 모셨다. '가엾은 둘째형을 찾아봐라'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청(幻聽)이 들렸다. 뉴기니로 가서 위령제를 모시기로 했다. '대하실록 태평양전쟁'을 탐독하고 조선인 희생자 5천명의 원혼을 달랠 추모사를 썼다.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맞고, 태극기, 수의, 제수 등을 준비해 떠났다. 도쿄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적도를 넘어가 뉴기니에 도착했다.

2002년 4월 30일, 태평양 바닷가 웨악에서 민간인 세 사람이 위령제를 올렸다. 초라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경건하게 진행했다. 원주민 30여명도 참가했다.

나는 추모사를 낭독했다.

"참혹한 태평양전쟁이 끝났음에도 이역만리 뉴기니 스턴레이 정글을 떠도는 혼령들이시어! 잔학무도한 일제가 패망하고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이제야 이곳을 찾아 영령들 앞에 엎드린 저희를 용서하소서. ⋯중략⋯ 역사의 강에 정의가 도도히 흘러 원한의 눈물을 닦아드릴 그날이 올 것이오니, 피맺힌 통한을 접어두시고 이제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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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쏟아지는 스콜 소리에 잠을 깼다. 호텔 낭하에서 개가 처절하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위령제를 끝내고 불태웠던 수의를 입고 누런 머리칼이 듬성듬성 빠진 형님이 마치 로봇처럼 뒤뚱거리며 다가와 '동생, 고마워. 여기까지 와서'하고는 사라졌다. 환상일까? 환청일까?

귀국하여 "어머니! 형님이 묻혀있는 뉴기니 흙입니다."라며 묘 주위에 뿌려드렸다. 나라도 말도 글도 빼앗기고, 창씨개명으로 이름도 빼앗겼다. 청춘도 빼앗기고 남태평양 정글을 떠도는 혼령이 되었다.

돌아가신 지 66년 만에 사망신고를 마치고 구청을 나오면서 "아이고~ 억울하고 불쌍한 우리 형님!"하는 탄식과 함께 눈물이 두 뺨에 흘렀다. 자식이 없어 호적에도 삭제되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형님 기일이면 제사상 앞에 엎드려 "하느님! 불쌍한 형님께 영원한 빛을 주소서.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라고 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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