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장막에 불이 꺼지고

▲ 붉은광장 레닌 묘에 참배객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담넘어 보이는 곳은 클레물린궁.
29년 전, 1983년 8월 29일 오후 4시 김포공항 JAL데스크. 여권과 항공권을 보고는 놀란 눈빛으로 “소련에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여기저기에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기관원들이 이리떼처럼 몰려왔다. 옥신각신하다가 제일 힘센 기관원이 나를 데려갔다. 출장목적을 꼬치꼬치 묻고는 어디엔가 전화를 한 뒤 나를 놓아주었다.

일본 하네다공항에서 KAL빼지를 단 사람이 다가와 “김국장님이시지요?”라 확인하고는 “처음으로 한국 사람이 소련에 가기 때문에 일본입국이 까다로울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돕겠습니다.”하고는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국수속이 끝나자 명함을 주며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하고는 가버렸다.

다음날, 소련영사관에서 비자신청을 했다. 휴게실에 소련을 상징하는 사진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중앙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왼편엔 강철처럼 냉철하게 보이는 레닌, 오른편엔 볼쇼이 발레리나.-

사진들을 보며 갖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일본에서 한국 선원들이 조총련 친척을 만났다고 감옥엘 갔다. 여기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인데, 내가 철의장막엘 가다니! 세상이 많이 변했음일까. 클레물린궁과 붉은광장은 어떤 곳일까. -소련인민은 공산주의로 인간개조가 되었을까-

비자를 받고 소련항공에 갔다. 좌석이 없다 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없었다. 하는 수 없어, KAL빼지께 협조를 구했다. 한참 후, 좌석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공산종주국과 반공전위국의 정보원끼리는 비밀통로가 있음일까-

다음날, 8월 31일 하네다공항을 이륙했다. 우랄산맥에 눈이 덮여있다. 모스크바 강에 유람선과 바지선이 평화스럽게 항행했다. 입국검사대에서 곤욕을 치렀다. 소지품을 내어놓았는데도 1차 불합격, 호주머니에 있는 동전 두 개를 내어놓았는데도 2차 불합격, 손목시계를 풀었는데도 3차 불합격, 안경까지 벗고 4차로 검사대를 통과할 때는 이놈들이 팬티까지 벗기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불안했다. -한국을 적대시하는 소련-

환전소 앞에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미화 100불을 서류를 한참 뒤적여 계산을 하고는 74루블 74코팩을 몇 번 세고서 내주었다. 암시장은 공정 환율의 3배 이상이었다. 폐차장에 갔어야할 택시를 타고 러시아호텔로 갔다. 택시기사가 잔돈을 주지 않고 가버렸다. -국가기능이 퇴화되는 소련-

호텔 입구에서 훈장을 주렁주렁 단 경비원이 저쪽으로 가라고 나를 밀어냈다. 저쪽 입구에서도 밀려났다. 세 번째로 들어간 곳엔 20개의 부스에 직원들이 잡담을 하고 있었다. 체크인을 모두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국제해사기구(IMO) 서류를 내놓고 왜 체크인을 안 해주느냐고 따졌다. 그제야 16번 부스에서 해주었다. 카드와 키를 받아가지고 6층 116호실에 들어갔다.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쳐진 내 몸을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동맥경화 말기환자 소련-

소련에서 첫날 밤 새벽 1983년 9월 1일 06시 24분,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요격기가 KAL기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탑승자 269명이 전원 몰살됐다. 그 시각 소련에 나 홀로 있었다. 동서냉전의 꼭지 점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KAL 폭파굉음은 소련의 단말마적 비명-

레닌은 “세계 약소민족들이여! 빵과 땅과 자유를 주겠다.”고 외쳤다. 정반대로 스탈린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을 황량한 중앙아시아에로 내몰았다. 수많은 동포들이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남한적화를 위해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토록 했다. 한반도가 초토화됐다. 거기에다 미사일로 KAL기를 폭파했다. -한민족 생존을 짓밟은 소비에트-

인공위성을 최초로 달나라에 착륙시킨 최고의 과학국가였다.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여 최강의 국방력을 보유했다. 동구권을 위성국가로 만들었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 공산혁명을 수출했다. -공산주의를 수출한 종주국-

하지만, 내 눈에는 소련이 붕괴되고 있었다. 카메라용 건전지를 사려고 흑해연안 항구들을 뒤졌으나 사지 못했다. 길게 줄을 서 기다리다 아이스크림이 매진되자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상품들이 화학처리가 되지 않아 냄새가 역겹고 눈이 시렸다. -생필품 부족으로 고통 받고 인민-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오데사에서 민박을 했다. 빈민굴보다 화장실이 불결하여 용변을 볼 수 없었다. 국립묘지에서 퍼레이드를 하는 소년병들은 인형극처럼 보였다. 차르정권을 무너뜨리고 노동자 농민을 해방시킨 위대한 공산혁명에 대한 선전은 고장 난 축음기처럼 어디서나 반복했다. -정치 과잉과 경제 빈궁의 소련-

KAL기 격추사건으로 국제여론이 들끓어 자유세계 항공기가 소련취항을 거부했다. 그로 인해 모스코바에서 열흘을 머무르며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불이 꺼져가는 철의장막-

소련은 70년 만에 붕괴됐다. 러시아로 부활했다. 동구공산정권도 무너졌다. 소련을 충실히 따르던 북한도 70년으로 끝이 나려는지. 굶주린 동포들의 탈북과 강제송환의 악순환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 저 가련한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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