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한중록

▲ 조선의 女人 나의 어머니.
55년 전, 대학입학시험을 보러 떠나는데 어머니께서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보름달빛에 바늘귀를 꿰여 만들었다"라며 하얀 가제손수건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노안(老眼)이라 대낮에도 어려운데 달빛에 바늘귀를 꿰었다니! 합격을 애원하는 정성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의 일생을 살펴보면 <한중록>이 생각난다. 사도세자의 빈이며 정조대왕의 모후인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은 구중궁궐에서 칼날 위를 걸어온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어머니는 여염집 필부(匹婦)로 비정한 수레바퀴에 짓눌린 참담한 인생이었다. 구중궁궐의 비빈이나, 여염집 필부나, 아녀자로서 겪어야 할 고통과 고뇌가 어느 쪽이 무겁고 어느 쪽이 가볍다 하리오.

어머니는 동학난때 외할아버지를 여의고 외할머니마저 보쌈을 당했다. 외증조모께서 양반의 핏줄임을 일깨우며 정제된 언행을 하도록 엄격하게 훈육했다. 그 훈육이 어머니에게는 일생의 족쇄가 됐다. 어머니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전답 스물한 마지기 유산을 갖고 우리 집으로 시집왔다.

신랑은 동갑내기인 나의 아버지였다. 청천벽력으로, 외삼촌이 투전꾼의 꾐에 빠져 공금을 유용했다. 이를 삭치기 위해 시집 올 때 지참한 전답을 팔아야만 했다.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넣으면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하물며….

설상가상으로, 일경에 쫓긴 할머니의 지인이 두고 간 폭약이 폭발하여 할머니는 두 팔을 잃었다. 어머니 팔이 할머니 팔을 대신해야만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떨어져 살 수 없는 이인삼각(二人三脚) 관계가 됐다. 그로 인해 어머니는 효부상(孝婦賞)을 세 차례나 받았다. 그것이 어머니의 처절한 인생에 무슨 보상이 되었으랴.

며느리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할머니는 몇 번 목숨을 끊으려했다. 사경을 헤매다 목숨을 구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의 방랑과 외도는 계속되었고 집안은 퇴락되어 갔다.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시부모 봉양하고 자식 양육하는 살림살이 도구에 불과했다. 감정도 감각도 없는 석녀로 치부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조선의 여인네들이 굴종의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집안의 희망이었던 둘째 형은 태평양 침략전쟁에 지원병으로 끌려가 뉴기니에서 전사했다. 어머니는 "천지신명님!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친정부모도, 시어머니의 팔도, 남편도, 재산도 다 빼앗겨야 합니까? 그러고도 모자라 천금 같은 자식마저…"라고 절통해했다. 밤이면 필사본의 심청전이나 장화홍련전을 읽다가 흐느꼈다. 소설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이 자신의 운명인양.

할머니에 이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5년 상을 치렀다.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에 삭망전(朔望奠)을 모셨다. 생베상복에 머리엔 수질(首絰)을, 허리엔 요질(腰紩)을 하고서 곡을 하다가 설움이 복받치면 바닥에 쓰러져 통곡했다. 어린 나는 옆에서 "울지 마!"라며 어머니의 등을 쓰다듬어드렸다. 누구에게도 속내를 들어 내지 않는 어머니이지만 애끓는 서러움을 시부모영전에 통곡으로 토해냈다.

모두들 어머니를 가련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인간으로 감내할 수 없는 수모와 고통을 견뎌냈다. 고통을 감내 못해 머리를 깎고 절로 가고, 목을 매거나 강물에 뛰어들었던 조선의 여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부모와 자식을 위해 자신을 불태운 성녀였다.

내가 고향에 내려가 성묘를 하고서 동네 어른들을 찾아뵈었다. 우리 집안 내력을 잘 아는 정(鄭)한약국 부인께서 "자네 자당은 여군자(女君子)일세"라며 파란만장했던 어머니를 안쓰러워했다.

아버지의 소실이 보약을 가지고 찾아왔다. 속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소실이 돌아갈 때, "또 오시게"라고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하자 "젊어서 죄를 많이 지은 이 년이 무엇이 예쁘다고 또 오라 하시오"란 대답에 "이제는 미움도 분노도 다 사그라지고 가슴이 휑하게 비어있네"라 응답했다. 용서일까? 자학일까?

혜경궁 홍씨는 정조대왕의 화성행차에 동행하여 문무백관의 배알을 받으며 영화를 누렸다. 나는 어머니께 단 한 번도 효도를 못해봤다. 취직을 했으나 당시 말단공무원의 봉급이 하숙비에도 미치지 못했다. 시골에 내려가면 아껴두었던 용돈을 내 손에 쥐어주려고 했다. 받지 않으려고 손사래를 치면 "남들 보는데 왜 이러나!"라고 눈을 흘기며 호주머니에 넣어주고는 등을 떠밀었다.

내 편지를 돋보기 안경 너머로 편지지가 헤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우편배달원이 지나가면 "내 아들 편지 없소?"라고 물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내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절절한 심정을 깨달았다면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올렸을 것을. 저승에서 지금도 내 편지를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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