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사랑

1997년, 회의 참가 차 영국에 간 김에 아들 학교의 강의실과 기숙사를 돌아봤다. 기숙사가 너무 허름하여 ‘세상에, 대영제국의 대학기숙사가 이럴 수가!’라며 난감했다. 기숙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났다. 여름방학 동안 한국에 돌아가 쉬어가라고 권했다. “우리보다 잘 사는 미국 독일 일본 학생들도 기숙사에 대해 불평 안 해요. 저도 아무렇지 않고요. 아버지가 이상해요”라는 퇴박을 맞고는 나는 귀국했다.

기숙사에서 나오게 하려면 장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여기저기 알아보다 한 규수를 만나보고는 “집안과 학교가 좋은데다 외모도 수려합디다.”라며 희색이 만면했다. 아들이 다음해 여름방학에 귀국했다. 첫눈에 반했음인지 3일 연속 밤늦게까지 만나고는 “아버지! 결혼하고 영국으로 함께 가겠습니다.”란다. “혼인을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식으론 안 돼.”라고 잘랐다. ‘이 녀석, 유학생활이 몹시 쓸쓸했는가보다’란 안쓰러운 생각에 “이번엔 약혼하고 겨울방학 때 결혼해라.”라고 내가 한 발 물러섰다.

며느리와 석 달쯤 같이 있고 싶었지만, 아침문안 3일을 받고는 떠나보냈다. 요즘 신랑감론 유학생이 인기가 없는데도 아들과 결혼해 준 새아기가 고마웠다. 딸을 애지중지 키워 우리 집에 보낸 사돈댁은 더욱 고맙고.

신랑이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나면 청소하고 빨래하고는 밥해 놓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날이 많지만 하루하루가 빨리 간다고 했다. 한가할 땐 몰래 강의실에 들어가 강의를 듣다가 신랑에게 들킨 일, 학생기숙사촌의 풍경 등, 매일 일과를 소상하게 적은 이메일을 사흘이 멀다고 보내와 비둘기 한 쌍이 사는 정겨운 모습을 멀리서도 훤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며느리가 귀국하여 몸을 풀었다. 나는 병원으로 달려가 며느리 이마를 짚어주며 “애썼다”고 했다. 애기가 백일이 지나 제 애비 곁으로 보냈다.

손녀 다슬이 첫돌에 우리 내외가 영국으로 갔다. 며느리가 침구며 주방기구며 집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우리를 맞았다. 유학생 가족들을 중국식당으로 초청해 조촐한 돌잔치를 했다.

애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한 보상으로 이태리 여행을 했다. 손녀를 보물처럼 건사하며 며느리를 앞세워 온 식구가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던 피렌체, 베니스, 나폴리, 로마를 관광했다. 때마침 베드로성당 광장엔 인파가 운집했다. 요한바오로2세께서 다섯 분 성인을 시성했다. 외교사절과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도들 수만 명이 참석한 시성식은 천상의 잔치인 양 장엄했다. 며느리를 위한 이태리 가족여행은 내 생애에 최대축복이 됐다.

아들이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서울대에 출강하면서 안양에 둥지를 틀었다. 나는 서울에 나갔다가 수원으로 돌아올 때마다 안양에 들렀다. 사양하는 며느리를 마트에 데려가 먹거리를 사주고는 손녀 다슬이와 노는 재미에 흠뻑 빠지곤 했다.

아들과 며느리의 갈등이 위험수위에 다다르면, 며느리를 백화점으로 불러내 선물을 사주고 용돈을 쥐어주면서 “요즘 철없는 젊은이들처럼 너희들도 남남이 될 수 있어. 그런데 다슬이는 어쩔래. 부모 감정 때문에 자식을 불행케 해서는 안 되지. 핏줄이란 것이 있다. 이혼을 하더라도 너와 애비의 피가 다슬이 혈관에 흐르고 있어. 그뿐 아니다. 너의 집안과 우리 집안이 다슬이를 통해 핏줄이 연결되어 있어.”라고 타일렀다. 그러고는 “어미야! 나에게 손자 하나 안겨다오. 그 놈 데리고 대중목욕탕에 갈란다.”란 부탁에 “예, 아버님!”란 며느리의 대답으로 갈등은 가까스로 봉합됐다.

이를 두고 며느리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는가 보다. 옛날 며느리들은 구박받고 소박 당했다. 친정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다’라고 간곡하게 타일렀다. 시댁 눈에 나면 ‘며느리 발꿈치가 달걀 같다’고 트집도 아닌 트집을 잡았다. ‘며느리 시앗은 열도 귀엽고, 자기 시앗은 하나도 밉다’했다. 아들 첩은 열도 좋은데 제 남편 첩은 하나도 못 본다는 뜻이다. 이런 이중 잣대로 인해 며느리들이 시달렸다.

아들이 미국대학으로 갔다. 며느리도 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딸 셋을 키워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며느리가 셋째 딸을 낳았다는 전화를 받은 아내가 “손자가 소원인데 또 손녀를 낳아 안 됐소.”라고 약을 올리면 “건강하게 낳아 잘 키우면 되지 손녀면 어때!”라 하면 “하여튼 며느리가 하는 일이면 무조건 OK”라고 핀잔을 준다.

칠순 때, 내가 은혜를 입은 친척, 선후배, 친지 120여명을 초대한 <報恩의 밤>을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며느리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옆에 있던 딸이 시무룩해서 “하여튼 시아버지 비위를 잘 맞추는 여우”라 했다. 나는 “미련한 곰보다 영리한 여우가 백번 낫지”라고 받아넘겼다.

친정아버지 심정으로 애잔하게 바라보는 내 마음을 며느리가 알까?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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