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에

은퇴할 즈음에 수원으로 이사했다. 수원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산골이다. 연고가 없어 고도(孤島)에 나 홀로 버려진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병풍처럼 감싸주는 뒷산 칠보산이 있어 마음은 편하다. 공기가 신선하고 소음도 없어 고요하다.

칠보산이 친구가 되어준다. 갈증이 나고 외로울 때면 산으로 간다. 이름 모를 나무들과 풀들, 바위들과 새들이 날 반겨준다. 괴상하게 생긴 바위에게 ‘넌 지지리도 못 생겼구나!’라고 흉을 보면 ‘그래, 내가 못 생긴 줄 잘 알아. 그런데 난 너와 다르지. 온갖 풍상 다 겪으며 몇 만 년을 이 칠보산과 함께 살아왔어.’라 말하고는 ‘넌?’ 하고 묻는다. 세상살이 하느라 이리저리 이사 다닌 나를 비웃는 것 같다.

소나무 숲 사이사이에 활엽수가 간간이 있다. 실낱같은 가지에서 돋아나는 잎눈이 깜찍하도록 귀엽다. ‘지난 겨울 혹한에 사람도 얼어 죽었는데 너는 옷도 안 입고 이불도 안 덮고 어떻게 살았니?’라 물으면 ‘물기라곤 눈곱만치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내가 불쌍했던지 동장군이 먼발치에서 보고는 지내가더라’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다가 벤치에 발랑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본다. 기러기 떼가 날아간다. 앞서가는 우두머리 기러기가 양 팔을 펼친 듯 좌우 일렬횡대로 북쪽으로 날아간다. 나침반도 없이 우두머리가 무리를 이끌고 시베리아까지 어떻게 날아갈까? ‘나도 너희들 틈에 끼여 한없이 날아가게 해주라’라고 허공에 외쳐도 대답이 없다.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글로 남겨두고 싶었다. 일본 공무원들은 퇴직하고서 책을 한 두 권 남긴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지 못 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세계으뜸의 기록문화유산이라고 하는 데 그 후예들은 기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일까.

컴퓨터 앞에서 용을 쓰다보면 몸은 지치고 생각의 길이 꽉 막힌다. 머릿속이 캄캄해져 아무런 생각이 안 난다. 그럴 때, 칠보산에 올라간다. 엄마 젖꼭지를 물고 있는 애기처럼 세상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지쳤던 몸에 생기가 돋아난다. 숲속을 한참 걷다보면 생각의 길이 여명처럼 어슴푸레 보인다.

그날은 바람 불고 가랑비가 내렸다. 서북쪽으로 뚫린 오솔길을 걸어가는 데 칠보산이 날더러 ‘바위처럼 바람처럼 가랑비처럼 살라”고 타이른다.

산 끝자락에 성당 공동묘지가 있다. 빼곡히 들어선 무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내가 죽어 묻힐 손바닥만 한 빈터가 있을까 하고. 별안간, ‘버리고 갈 몸뚱이가 이곳에 묻힌들 어떠하며, 뼈를 갈아 바다에 띄워 보낸들 어떠랴.’란 생각이 든다. 육신은 흙에서 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영원불멸이라 하는데 무덤이 무슨 대수냐고! 심신을 갈고 닦아 내 영혼이 하늘나라로 가면 될 것을….

허나, 저승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죽음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하여, 죽음은 마냥 슬프고 무섭고 절망이다. 사람이 살아서 죽음을 체험하지 못해서이다.

인간이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을까란 철학적 질문은 몇 천 년을 이어왔다. 그러나 명쾌한 해답이 없다. 공자님께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하시며 죽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 후를 알겠느냐”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 분은 철학적 의문을, 한 분은 신앙적 확신을 제시하셨다. 두 분의 말씀이 엇박자 같지만, 본질은 세상을 착하게 살라는 것이다.

이 공동묘지에 잠들고 있는 분들의 육신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갔으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난 알 수 없다. 허지만 본능적으로 신앙심이 발동됐음인지 ‘그들에게 빛을 비추소서.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라며 십자성호를 그었다.

종교와 무관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몸과 마음을 불살은 사람들이 많다. 예술과 문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 지고지선(至高至善)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미켈란젤로, 베토벤, 섹스피어, 다윈은 불후의 명작을 창작했다. 세종대왕께서는 무지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혼신의 열정을 바쳐 한글을 창제하셨다. 그러기에, 그분들은 가셨어도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공자님과 예수님은 중생들에게 자기희생의 숭고한 삶을 살라고 당부하신 것 아닐까?

어린애 같이, 설익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오솔길에는 아직도 바람이 불고 가랑비가 내린다.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