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 숙부의 동네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그 동네를『구러개』라 했다. 동네 초입에 주막이 있었고, 주막 옆에 수백 년 된 정자나무가 수문장처럼 지금도 동네를 지킨다. 정자나무 밑에 널따란 바위가 있어 길손이 쉬어가고 농사꾼들이 참을 먹고는 오수를 즐겼다. 정자나무 주위를 들판이 둘러싸고, 그 들판을 올망졸망한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다만, 동쪽은 대문처럼 열려있는데 그 끝자락에 섬진강이 흐른다.

그 주막에 칠촌숙부가 살았다. 증조부 형제는 3분이었다. 첫째는 진주에서 종가를 지켰고, 둘째는 하동으로, 셋째는 곤양으로 이주했다. 곤양 증조부 손자 중 한 분이 역마살이 끼였음인지 일찍 가출하여 남사당패에 끼어들었다.

남사당은 조선시대 유랑연예집단이다. 양반들의 천대를 받아가며 농악, 탈춤, 줄타기, 땅재주를 했다. 이들은 서민의 애환을 달래고 양반을 풍자하며 민중의식을 일깨웠다. 남사당의 한(恨)과 혼(魂)이 되살아나 오늘날 K-Pop이 세계를 감동시키는지도 모른다.

춤과 노래, 북과 장구에다 재담도 능했던 숙부가 신명이 차츰 나지 않자 남사당패에서 빠져나왔다. 귀향 도중에 둥지를 틀고서 먹고살려고 주막을 차린 곳이 구러개였다. 남사당을 천시하던 시대에 주막까지 하였으니 오죽이나 괄시를 받았을까!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진주나 곤양은 아득히 멀고 가까운 섬진강 건너에 있는 큰집을 드나들며 ‘나는 부관참시를 당한 점필제(佔畢齊) 후손으로 상것이 아니오’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언근설적 알렸다.

할아버지가 “구러개에 가자”며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사공이 길손을 반기며 노를 저었다. ‘꾸르륵 꾸르륵’ 비둘기 우는 소리를 하며 나룻배가 강을 가로질렀다. 가을하늘 뭉게구름이 쪽빛 섬진강으로 내려앉아 강바닥에서 일렁거렸다.

사공이 삿대로 밀어 나룻배가 나루터에 닿았다. 나는 할아버지께 안겨 내렸다. 꼬불꼬불한 밭두렁과 논두렁, 오솔길을 걸어 산등성이에 다다랐다. 들판이 내려다보였다. 황금물결이 시원스럽게 넘실거렸다. 할아버지가 들판 끝자락을 가리키며 “저 정자나무 옆에 네 숙부가 사느니라”고 말씀하며 앞서 걸어가셨다. 나는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숙부 댁에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내 왔네”하고는 참게낚싯대와 왕골망태를 챙겨 집 앞 개울로 갔다. 낚싯대에 미꾸리 미끼가 끼워졌고, 다른 낚싯대에는 수탉꼬리로 만든 올가미가 동여매여 있다.

개울둑에 앉았다. 서쪽 산에서 발원하여 동쪽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개울물은 수정처럼 맑았다. 미꾸리 미끼를 돌 틈에 넣었다 빼었다 하면 참게가 미꾸리를 물려고 돌 틈 밖으로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집게다리로 미꾸리를 무는 순간 올가미로 낚아챘다. 열개 다리를 허공에 휘적거리며 ‘날 살려’란 듯 발광했다. 약이 바짝 오른 집게에 물리면 손가락이 잘릴 것만 같았다.

“이놈, 꼼작 마!”라며 참게 등짝갑각을 제압하여 왕골망태에 감금시켰다. 할아버지의 잽싼 솜씨가 어떻게나 절묘한지! ‘나도 커면 할아버지처럼 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해질 무렵 낚시가 끝났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에 잠자리를 폈다. 나는 할아버지와 숙부 사이에 누었다. 두 분이 정담을 이어갔다. “금년 농사는?”, “눈이 어두워 볼 수 없지만 평년작일 것 같네요”, “눈이 더 바빠졌나?”,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부모 속 태우며 남사당패 따라다닌 죄 값을 톡톡히…”, “무슨 그런 말을”, “마당에 횃불을 밝혀놓고 새벽까지 놀이를 하면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요.”

한참 있다 “이곳에서는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농사짓고 나무하느라 온 몸이 성한 곳이 없네요. 눈인들 온전하겠습니까?” 할아버지와 숙부의 한숨소리에 구러개의 밤은 깊어갔다.

6∙25전쟁 때, 구러개로 피난을 갔다. 할아버지와 숙부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팔촌형이 생필품을 등짐으로 날라다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패주하는 부대를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채병덕은 7월 27일 하동에서 인민군 제6사단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제트기가 폭격을 하여 하동은 불바다가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숙모는 논두렁에서 “내 아들 죽었네!”라며 가슴을 치며 훌쩍훌쩍 뛰다가 실신했다. 천만다행으로 형님은 살아서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 장년이 된 나는 성묘를 하고는 구러개로 건너가 형님을 뵙곤 했다.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주 오지 않는다고 섭섭해 했다. 일가들이 가까이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이 형님의 이상이었는데 돌아가셨다.

구러개는 옛 그대로인데 옛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나만 홀로 남아 고향보다 진한 구러개의 향수(鄕愁)를 반추하고 있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