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소풍 아름다웠다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매달 둘째 금요일, 옛 직장동료들이 명동성당에 모인다. 얼굴들에는 젊은 날의 애련한 추억이 서려있다.고락을 함께했던 동료인데다 신앙이 같아서인지 흉허물이 없다.

모두들 나이가 예순을 넘어 일흔들이다. 공직생활이 몸에 배어 스스로 품위를 지키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들이라 제 잘랐다고 티격태격하지 않는다. 여니 노인들 모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톨릭 교리 공부를 하고서 미사에 참여한 뒤, 점심밥상을 함께 한다.

늦가을비가 내려 번화하던 명동거리도 스산했다. 아스팔트 위에 비를 머금은 낙엽을 밟으며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날, 교리교재에는 '하느님은 슬픔과 기쁨, 괴로움과 즐거움 모두에 존재한다. 높은 곳에도 낮은 곳에도, 선함에도 악함에도, 아름다움에도 추악함에도 존재한다'라고 기술돼 있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현존한다는 의미이리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흉악범이 참회하자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흉악범이 참회하여 영혼이 구원받는 극적인 장면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림으로 인류가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가톨릭교리가 참회와 용서로 단순화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구약시대의 율법 못지않게 까다롭다.

어느 스님이 종교는 신앙이 아니고 윤리라 했다. 신앙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지만, 윤리는 사랑과 용서의 실천이라는 스님의 설파가 가슴에 다가온다.

난해한 가톨릭교리 해설자가 사제나 수도자가 아닌 옛 동료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승승장구했던 정통관료였다. 세상사를 만만하게 보았음인지 중도하차하고 서부개척자인양 대관령에서 목축업에 도전했다. 그러나 목부(牧夫)를 하찮게 본 탓으로 실패했다. 전문가를 소홀히 했으니 목축이 제대로 될 리 없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것이 세상사다.

서울로 돌아와 이런저런 일을 해보았으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옛말이 틀릴 리 없다.

그에게 맑은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불행이 닥쳤다. 아들이 사제서품을 며칠 앞두고 어느 여인의 진정이 동티가 되어 사제의 길을 접어야만했다. 각고의 고통과 좌절에 흐느적거리던 그는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신학대학원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았다. 절대자의 신비를 체험하며 가톨릭 관련 서적을 일곱 권이나 출간하며 교리에도 해박해졌다.

나는 교리가 너무 멀고 아득하다. 허나, 그분이 내 곁에 계심을 느끼고 그분과 대화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불을 끄고는 그날에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말씀드린다. 청원도 한다. 꽃보다 예쁜 다섯 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게 해 주십사는 소박한 청원이다. 때론 나라를 위한 거창한 청원도 하지만... 삼라만상이 잠든 한밤의 명상은 무거운 번뇌를 내려놓게 한다.

"신록의 계절에 찬란했던 나뭇잎들이 나뭇가지에 그대로 매달려 있게 해 달라고 제아무리 애원해도, 가을바람에 낙엽 되어 땅에 뒹굴다 흙으로 돌아갑니다"란 젊은 사제의 미사강론이 여운을 남긴다. 나 역시 낙엽처럼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깜박 잊고 살았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란 시에 곡을 붙인 파견성가를 마지막으로 미사가 끝났다.

거대한 권력에 탄압받고는 적개심에 불타고, 그러다 세상을 저주하면서 자신이 망가져간다. 하지만 신인은 온갖 세상풍상을 다 겪고도 '이 세상 소풍 아름다웠다'는 회상에는 참회와 용서, 그리고 화해가 스며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낸 그 고뇌가 얼마나 아팠을까?

명동성당 가까운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교리시간과 미사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밥상머리가 자유분방하게 시끌벅적했다.

누군가가 "나포리옹코냑, 그 선배 문밖 출입을 못 하신지 오래 됐어"란 소식을 전했다. 나포리옹처럼 작은 키에 술자리에서 "먹고 죽자"라며 기염을 토해 내 붙은 별명이다. 그는 고교에서 밴드마스터를 하다 대학에 진학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상대편은 밴드로 멋을 부리는데, 자기편은 꽹과리나 두드리는 응원이 촌스러워 밴드부를 창단했던 호탕한 사나이였다.

모두들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털어놓는다. 자식도 꺼리는 시신을 오뉴월 폭염에 악취를 마다하지 않고 존엄하게 염을 했던 위령회원의 경험을 듣노라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오늘날은 병원에 냉장고가 있고 전문업체가 장례를 치른다. 옛날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지금도 형편이 어려운 곳에는 연령회원들의 몫이다.

다양한 이야기가 안주거리가 되어 밥상은 풍성하다. 세상 어디에나 눈물겨운 슬픔과 사랑이 있어 시인은 '이 세상 소풍 아름다웠다'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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