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추억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올 여름처럼 혹독한 더위가 또 있었을까? 찜통 같은 열대야에 잠 못 이뤄 뒤척이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고향집 여름밤이 생각난다.

헛간 초가지붕에 박 넝쿨이 무성했다. 대낮엔 뙤약볕에 박꽃들이 시들시들했다가도 해가 지면 하얀 꽃들이 밤하늘 달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여름밤, 나는 할아버지랑 마당에 덕석을 펴고 나란히 누었다. 매콤한 모깃불 연기냄새. 뒤뜰 대밭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먼 옛날인데도 어제와 같이 떠오른다. 달이 구름 속으로 가는 것을 말없이 쳐다보시던 할아버지는 기우러가는 가운(家運)을 한탄하셨음인지 간간이 긴 한숨을 내쉬셨다.  그러다 내게 물으셨다.

“저 달에 무엇이 있나?”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지요.”
“그래, 그렇단다. 달나라에 가고 싶으냐?”
“예, 가고 싶어요.”
“어떻게 갈래?”
“돛대도 삿대도 없는 큰 종이배를 타고 바람과 구름에 실려 갈래요.”
“그래, 좋은 생각이다. 꼭 그렇게 해 봐라.”

할아버지는 엉뚱한 내 동심을 즐겨 들어주셨다.

부지런하기 이를 데 없던 할아버지는 동이 털 무렵 개똥망태를 메고나가 개똥을 주어다 뒷간에 쏟아 부었다. 부엌 허드렛물도 버리지 않고 뒷간에 부었다. 비료가 없던 시절이라 인분으로 농사를 지었다.

돼지우리와 외양간에서 나온 거름을 논밭에 뿌려 지력을 높였다. 벼농사가 끝나면 보리와 밀을 파종하여 논밭을 묵히지 안했다. 할아버지는 머슴과 일꾼보다 쟁기질이나 도리깨질을 더 잘하는 만능농군이셨다.
취미도 다양하셨다. 농한기엔 덕석과 가마니를 짜고, 짚신도 몇 죽씩 엮어 곡간에 매달아두었다. 돌감나무에 접을 붙여 장두감이 열게 하는 원예취미. 활과 엽총으로 사냥하는 취미. 물려받은 전답도 있었지만, 몸에 밴 근검절약과 영농을 잘 해서 부농이 됐다.

그러나 뜻밖의 재앙이 닥쳤다. 할머니 가까운 지인이 두고 간 폭발물이 터져 할머니는 만신창이가 되셨다. 집은 부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진주도립병원에서 3년간 입원치료를 했으나 두 팔을 잃고 상처투승이로 집에 돌아오셨다.

참혹한 재앙이 재산손실은 물론, 정신적 공황이 더 심각했다. 항일 조선인들을 검속하던 때라, 순사들이 폭발물이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괴롭혔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를 실시했다. 토지조사국에 일정양식으로 토지를 신고토록 했다. 친일인사들에게는 사전에 귀띔을 해주어 토지신고를 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들은 신고방법을 몰라 토지를 몰수당했다. 몰수한 토지를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에게 불하했다.

할아버지도 토지를 빼앗겼다.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할 아버지는 방랑으로 논밭을 팔고 집을 저당 잡혔다. 무너지는 집을 기둥으로 괴이기는커녕 기둥을 뽑아냈다. 땀 흘려 쌓은 할아버지의 성은 무너졌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농기구를 챙기셨다. 할아버지는 곡괭이와 삽을 메고, 나는 낫과 호미를 들고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대밭과 언덕 사이에 공터를 곡괭이로 파들어 갔다. 곡괭이질을 하시다가 “아이고 허리야”하며 손등으로 허리를 두드리셨다. 갈퀴로 뿌리와 잡초를 걷어내니 비옥한 텃밭이 됐다.

가산이 탕진되어 절망의 나날을 보내시다가 노쇠한 기력으로 일군 밭에 완두콩을 심었다. 줄기덩굴에 하얀, 분홍, 자줏빛 형형색색의 완두꽃들이 탐스럽게 피었다. 할아버지는 완두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네 애비 같이 세상을 살지 말거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불구의 몸이 되고서 스물아홉 해 인고의 세상을 사시다가 숨을 거두시던 날, 할아버지는 “흑 흑 흑” 흐느끼며 눈물을 삼키셨다. 그러고는 네 해를 지나 여든둘에 세상을 떠나셨다. 일생동안 애써 쌓은 할아버지의 성이 연기처럼 사라져 가슴에 한을 품은 채…. 노환도 없이 어쩌면 그렇게도 정갈하게 눈을 감으셨을까?

돌아가신지 70여년이 되었건만, 이 여름밤에 유난히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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