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간다간다 하면서 늦어졌다. 몸이 개운치 않은데도 출발했다. 가을 정취가 향기로워 몸과 마음이 상쾌해졌다. 아름다운 풍광 위로 서글픈 옛 기억들이 겹치며 떠오른다.

내가 네댓 살이었을까,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에 업히거나 손을 붙잡고 성묘를 다녔다. 첫째형님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고, 둘째형님은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뉴기니 전쟁에 참전했다. 대가 꺾일 상황이라 어린 나를 성묘에 동행시키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묘와 제사에 젖어들었다. 선대들이 세상 떠나고선 나 홀로 고향을 찾아 성묘했다. 성묘를 못하고 해를 넘기면 찝찝했다. 외국에서 기일은 맞아 호텔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6∙25전쟁이 나던 그 해에 세상을 떠나셨다. 지관(地官)이 선산에 모시면 집안에 우환이 있다하여 공동묘지에 모셨다. 하지만, 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는 선산에 모셨다. 6∙25전쟁이 우리 집 시계를 멈춰 세워 할아버지를 선산으로 이장을 못 했다. 두 분은 같은 고향땅에서 이산가족이시다. 말씀은 없으시지만 얼마나 원망하실까?

부모님은 연고도 없는 타향에 잠들어 계신다. 여우도 죽을 때 자기가 살던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데 부모님은 고향이 얼마나 그리우실까? 누님이 찾아와 꿈에 어머니께서 ‘내가 물속에 있다’고 하신다며 묏자리를 옮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돈을 마련해 첫째 형님께 드렸다. 한참을 지나 그 돈으론 어림없다고 전해왔다. 큰 산에다 호화분묘를 하라는 건지, 원.

내가 은퇴하고서야 조상들 묘를 한곳으로 모시려고 묘지를 알아봤다. 지인이 “명당인 선산을 두고서 조상님을 어디에 모시려 하느냐”고 날 나무랬다. 선산은 넉넉한 면적에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여 경관이 좋다. 아름드리 도래솔이 선산을 지켜준다. 공원 경내라서 군청(郡廳)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다.

명당인 선산을 두고서 꼬불꼬불 돌아온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컴퓨터 앞에 앉아 선산이 공원과 조화가 되도록 구상했다. 퇴락한 집안이지만, 조상의 행적을 오석(烏石)에 새기고 증조부모님부터 3대의 부부합장묘에 야트막하게 둘레돌을 쌓고, 뉴기니 정글 어디엔가 쓸쓸히 묻혀있을 둘째형님의 가묘(假墓) 앞에 사무친 원한을 새긴 묘비를 세우는 등 소박하게 설계했다. 한식날을 이장 날짜로 잡고서 셋째조카를 입회시켜 장묘업자와 계약했다.

며칠 후, 셋째 조카며느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디 물어보니 자기들에게 화가 미친다며 이장은 절대로 안된다 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당장 벼락을 맞을 듯 막무가내였다. 60여 년 전 할아버지를 선산에 모시지 못하게 했던 지관의 망령이 되살아났음일까?

이유가 따로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선산 지적대장을 떼어보니 등기가 되어있지 않았다. 첫째 형님께 서류를 드렸으나 차일피일하다가 셋째조카에게 넘겼다. 셋째조카가 자기 개인 명의로 등기를 하고서는 욕심이 생겼다. 과실나무들을 심어놓고는 조상을 못 모시게 했다. 남부끄러워 대응할 수도 없고…

또 다른 기억이 되살아났다. 선친의 소실은 소생이 없었다. 회갑연에 참석한 나에게 후사를 의논했다. 선친 그늘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모은 재산을 나에게 넘겨주려 했다. '친정조카들 중에 찾아보시지요'라고 사양했다. 소실로 인해 인고의 세월을 살다 가신 어머니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서.

소실이 세상을 떠나 장례식에 참석했다. 상속을 받은 소실의 생질녀 남편이 돈에 욕심이 과대해 찝찝했다. 내 얼굴을 보고 온 문상객의 부의금은 구분해 두었다가 장례 예식을 치러준 교회에 헌금과 상여꾼들과 부엌 허드렛일을 했던 분들에게 골고루 답례를 하고선 떠나왔다. 목회자였던 생질녀 남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소식이 없다.

나는 나물 먹고 물마시던 옛 선비들의 청빈낙도를 본받으려 했다. 허나, 그 청빈낙도가 결벽증이 아닌지!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는 불가의 말씀대로 수더분하게 살았으면 좋을걸… 나 홀로 고고한 체 하다 선산관리도 제대로 못한 어리석음이 후회스럽다.

하기야, 조상 묘를 돌보지 못해 폐묘가 되는 세상에 선산을 정비했던들 그 누가 대를 이어 돌보랴! 하여, 유골을 분쇄하여 약장(藥欌)같은 납골당에 유폐시키거나 바다에 날려 보낸다. 그럴 바에야,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했으니 그대로 두고서 내 생전에 정성들여 성묘나 하련다.

이번 성묘가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생명보다 날 더 사랑하셨던 할머니와 어머니께 '초막을 짓고 밤낮으로 돌봐드려도 모자라는데,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삐끗 왔다가 가는 저를 용서하소서'라고 엎드려 응석을 부렸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