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 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사곡시는 내 고향 사곡면(舍谷面)이 원산지인 감의 품종명이다. 토종의 떫은 감으로 조생종이어서 연시(軟柿)나 곶감보다는 침시(沈柿)에 더 적합하다. 예천의 고종시나 상주의 둥시와 같은 원추형이 아니라 청도의 반시를 닮은 편원형(扁圓形)의 감이다. 그러나 횡단면이 반시의 방형(方形)과는 구별되는 원형이다.

다른 품종들이 아직도 푸르게 성장하는 구월 중순이면 사곡시는 이미 배꼽부터 노르스름 익어 가면서 당도를 축적한다. 그걸 따다 뜨겁지 않은 물로 하루 남짓 탈삽(脫澁)시키면 추석제수나 가을운동회에 생광스러운 햇과일이다. 껍질이 얇고 과육이 연한데다 조생종이어서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진상품목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한다. 꼭 그런 연유야 아니겠지만, 유일하게 원산지의 지명을 딴 품종 이름이다. 현지에서는 ‘숲실’ 마을이 주산지라서 숲실종, 혹은 맛종(좋은)감으로도 불린다.

감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가 흠씬 늦었다. 봄의 전령이라 할 산수유 노란 꽃띠가 마을 앞 냇가를 휘돌아나가고 앞 뒷산 기슭의 복사꽃, 살구꽃이 환하게 피어올라도 감나무는 겨울나무 그대로였다. 모란과 함박꽃의 훈향이 초록보리 들판을 물결칠 때쯤에야 겨우 잎눈을 틔우지만, 정작 꽃이 피는 것은 아카시아 향내가 산골마을을 뒤흔들고 떠난 여름의 초입이었다.

여인네의 바느질 골무에나 견줄까 볼품없는 생김새에 여린 옥빛의 성근 꽃송이들이 이미 무성한 잎더미 속에서 쉽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거기에 이렇다 할 향기조차 없으니 웬만한 계절의 감각으로는 피는 둥 지는 둥 그런 꽃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들의 둔감 탓일 뿐, 아카시아 꽃과 함께 사라졌던 벌들이 미미하게나마 연두색 이파리 속을 드나들기 시작하면 바로 감꽃의 계절이었다.

이맘때면 동네 조무래기들의 새벽이 분주해진다. 밤새 떨어진 감꽃을 줍기 위한 달음질이다. 마당과 뒤뜰을 돌고도 시간이 되면 이웃집 뒤란이나 마을 앞 감나무 밭도 훑어야 한다. 새벽이면 풀잎이슬 위로 클로버 꽃처럼 내려않은 그것들을 볏짚대나 겨릅에 꿰어 와서 햇살에 말리면 보릿고개 시절의 별미거리였다. 갈색의 그것들에 쌀가루를 입혀서 쪄낸 감꽃설기의 은은한 단맛은 어린 입맛에도 사카린의 탁한 감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름이 짙어가면서 감 알이 제법 커지면 그것을 줍기 위한 경쟁이 감꽃시절의 달음박질보다 긴박해진다. 밤톨만한 낙과를 이삼 일만 삭히면 가을 연시에 그다지 손색없는 단맛으로 익는다. 이때 감을 물리는 장소로는 쌀독이나 보리쌀 항아리가 최상이어서, 그곳 곡식의 표면에는 나와 누나들의 꼭지 빠진 풋감이 서로 뒤섞이지 않게 놓여 있었고, 끼니때마다 땟거리를 떠내는 어머니는 우리들의 자급별식을 흩트리지 않으셨다.

감 줍기가 된서리시절까지 이어지면서, 우리들의 봄, 여름, 가을은 온통 감나무와 함께였다. 날마다 해가 지고 나서야 파하는 깡통 차기 숨바꼭질의 술래자리는 의례 동네감나무 밑동이었고 여름방학 중의 조기운동(早起運動) 집합장소는 고삿 감나무 그늘이었다. 해마다의 단오절 행사 또한 뒷산 기슭의 큰 감나무 벌에서였다. 그곳에는 밑둥치가 어른의 두 아름도 넘는 반시(盤枾) 두 그루가 하늘이 보이지 않게 서 있어서 마을에서 큰 감나무라 불렀다. 그중 한 그루의 ㄴ자 가지에 짚으로 꼰 그넷줄이 까마득히 매어지면 동네 여자들의 명절 매무새가 하늘가로 나부꼈다. 맞은편은 입향조(入鄕祖)의 산소 벌이어서 장정들의 씨름판이 그곳에서 벌어졌다. 씨름판의 남자들은 여인네들의 그네타기를 곁눈질로 품평하고, 그네를 타면서 씨름판을 정찰하는 여인은 남정네의 시합 현황을 감나무 밑 여자들에게 중계하는 판이었다.

그곳 큰 감나무의 가을 성과(成果)는 작은 놋대접만해서, 이의 낙과를 다투는 경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인가를 한참 벗어난 산기슭이어서 나처럼 여린 담력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곳에는 귀신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감 줍기에 명수인 또래 하나가 꼭두새벽의 그곳에서 하얀 여자 귀신을 보고는 혼비백산했다고 했다. 크고 잘 익은 자기네의 반시를 새벽마다 쓸어가는 아이를 말리려는 큰 감나무 집 할매의 연극이었으리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낙엽이 지고 나면 마을은 온통 붉은빛 천지였다. 집집의 마당과 지붕은 감색으로 뒤덮이고 마을 앞 냇가에는 진홍빛 산수유가 터널을 이루었다. 여기에 들판의 황금물결이 어울리면서 곱고도 풍요로운 고향의 가을이었다.

감나무도 사곡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종시에 월하시, 반시까지 골고루 있었지만 해 거름을 모르는 연년 풍작에 한 품종 같이 씨가 생기지 않았다. 고향의 토질 덕택이라 했다. 그런 것도 같았다. 산야에는 새박, 지치(자초), 백출, 반하 등의 약초가 흔했고, 이름난 의성마늘도 주산지는 사곡면이었다. 거기에 국내 최고령의 산수유 거목들이 동네마다 개울과 전지 둔덕에 왕성해서, 대구약령시의 약재 공급처로서 백약촌(百藥村)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았다. 그러자니 초여름 들판의 모란과 작약의 녹의홍상 물결은 신록과 소쩍새 계절의 장관이었다.

갈보리와 마늘갈이 틈틈이 감을 따고 저녁마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곶감을 깎는다. 뭐라 해도 토종 감의 효용으론 곶감이 제일이다. 육질이 너무 물렀거나 제때에 깎지 못한 놈들은 오지항아리에 밀봉되어 연시로 들어간다. 겨울 지나 봄까지의 보조양식이다. 그러면서 처마 끝의 곶감 줄은 새벽마다 늘어난다. 그때 줄줄이 매달린 곶감의 타닌산이 단맛으로 숙성되면서 늦가을 왕벌들이 붕붕거리던 고향집 대청마루는 더 이상 가질 것을 몰랐던 내 어린 시절의 풍요였다. 다만, 곶감 줄 사이로 멀리 내다보이는 늑두산(勒頭山)의, 미륵의 머리를 닮았다는 준봉들은 왜 하나같은 남색일까 하는 궁금증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고향의 감나무들이 해가 다르게 쇠잔해 간다. 새로 심어 가꾸는 일 없이 있는 나무들만 하나둘 사라져 간다. 그나마 돌보는 손길이 없으니 열매와 나무의 몰골이 말도 아니게 타락해 간다. 한때는 궁중에서도 대접을 받던 사곡시가 저 혼자 열렸다가 떨어지면서 영락없는 돌감을 닮아 간다. 사람들이 거두지 않는 지천의 홍시야 이제 까막까치들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고향마을 또한 감나무들을 닮아 간다. 사십여 호의 집성촌이 반으로 줄어들고 그나마 절반은 행사 때나 불을 켜는 빈집들이다. 기껏 십여 호가 아침저녁으로 연기를 피우지만, 대부분은 당신들의 최후 행사만을 기다리는 짝 아니면 외톨들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은 공연한 도로확장으로 반이 넘게 뜯겨나갔다. 그간 객지살이가 서운해도 감나무 생가가 든든했기에, 감나무 시(柿)자에 처마 끝 헌(軒)자를 써서 감히 시헌(柹軒)이라 했던 내 아호의 원전(原典)이 복구불능의 화를 입은 것이다. 비록 타성바지가 살고 있긴 해도, 삼간겹집 안채에 사랑채와 헛간채 위로 드높은 감나무 세 그루가 표피만 늙어갈 뿐, 형체는 그대로여서 간간의 고향발길이 가벼웠는데, 처참한 불구의 모습에는 내 육신이 찢긴 듯 가슴 아리다. 차라리 빈터로나 남았더라면 마음속의 모습이나마 온전하련만.

고향마을 안산(案山) 계곡에도 십여 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많지도 않은 다섯 남매가 오순도순 지내면서 형우제공(兄友弟恭) 의좋게 따서 노느라고, 삼년 키운 고욤나무에 감접을 붙여서 새순부터 다시 가꾸신 아버지의 원려였다. 해마다 가을이면 계곡 수북 주황빛 감 더미였다.

내가 그곳을 들른 것은 고향마을에서 문중대사가 있던 어느 가을이었다. 내 가족과 두 누님 내외가 함께였다. 접근로의 가시덩굴을 헤쳐 들자, 눈에 익은 감색 숲이 그간의 내 부재를 원망하듯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왔다. 남김없이 따 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족대로 따고 줍는 사이 나는 가지를 타고 올라서 울분을 토하듯 장대를 휘둘렀다. 그러면서 자꾸 눈물이 났다. 소용에도 없는 짓거리로 서울길만 지체시킨다면서 제 어미를 타박하는 아들놈들의 철부지를 못들은 척 뭉개면서, 파란 하늘 덩그런 우듬지를 부둥켜안고 남모르게 서러웠다.

그날, 반의반도 따지 못하고 작별을 고했던 그곳 아버지의 미 상속 유산은 지금도 저 혼자서 열매를 맺고 떨어뜨리고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 잡목 숲에 묻힌 채 나처럼 쇠잔해 가리라. 내가 아둔한 탓이다. 이제야 통감하는 속절없는 세월에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다.

나 또한 고향처럼 메말라 간다. 외피가 흙빛을 닮으면서 도회지살이의 효용이 한 해가 다르게 체감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적잖이 남은 시간을 어이 할거나. 어느 산수 맑은 전원에 작으나마 청마루가 딸린 삼간모옥이라도 짓고, 마당가에 서너 그루의 감나무를 심어 가꾸면 언잰가는 내 시헌(柿軒)이 복구될 것인가?

객지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주말의 고향집을 들어서면, 식구들은 마실 나가고 적막이 가득한 마당에 벌겋게 물든 감잎이 발 디딜 틈 없이 깔리고, 감잎보다 짙붉은 장닭이 흑공단 꼬리를 깃발인 양 드높인 채, 뒤뚱뒤뚱 살찐 암탉들을 데리고 감잎더미를 뒤적이던 고향집 마당 중참나절 오후의 가을 햇살. 지금껏 항로와 객지를 넘나들면서 그때 그 감잎만큼 넉넉하고도 고운 단풍잎이 또 어디에 있었던가.

선홍빛이 투명하도록 잘 익은 홍시 하나를 따 들고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면, 동네에 하나뿐인 우리 집 태엽 벽시계가 큰방 문설주 위에서 저 혼자 뚝딱거리다가 댕댕 종을 치기도 하던 그곳 그 시절의 흠결 없는 평화를 다시 한 번 맛볼 수는 없을까.(1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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