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한글이름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내 첫 작품이 태어났다. 1967년 11월 12일이다. 명동 성모병원에서 첫 대면을 했다. 수정처럼 맑은 눈망울이 “아빠! 예쁜 이름지어주세요”란다. “그래, 네 이름을 10년 전에 지어두었단다”라 답했다.

1957년에 바닷가 수도원처럼 사회와 격리된 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의 자유와 낭만을 모르는 채 혹독한 훈련과 엄격한 규율에 숨 막혔다. 아름다웠던 고교시절을 그리며 바다를 바라봤다. 기선이 백파(白波)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농부가 쟁기질을 해 밭이랑을 짓 듯, 뱃고물에 바다 이랑을 남기곤 배는 어디론가 떠났다.
백파에서 두 단어가 연상됐다. 하나는 耕海, 다른 하나는 이랑이다. 어차피 바다와 인연을 맺었으니 일생 바다를 갈며 살겠노라고 내 호를 耕海라 자작했다. 젊은이에겐 호가 건방지게 보여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중년이 되어 로터리 클럽에서부터 사용했다.

이랑은 딸 이름으로 간직해 두었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 수확하는 밭이랑은 여자의 생명잉태에 비유된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기선의 고물에 일렁이는 바다 이랑엔 마도로스의 낭만과 향수가 담겨있다. 이랑은 받침 없는 체언에 붙어 두 개 이상 사물을 연결해 주는 접속 조사다. 하여, 이랑은 친구 간, 가족 간에 매체가 되어 화목하라는 염원이 있다.

고향 읍사무소 호적계장이 한글이름이라고 출생신고를 거부했다. 정부수립 직후 제정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에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라고 규정되어 20년이 지났는데도, 호적은 공문서가 아닌가? 물러서지 않고 굳세게 밀어붙여 이랑으로 등재됐다.

딸 이랑은 자라면서 친구들과 잘 사귀고 문제를 잘 해결해 주어 ‘해결사’란 별명이 붙었다. 한적하다가도 이랑이가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집안이 훈훈해졌다. 참 좋은 짝을 만나 딸 둘을 낳아 건강하게 키우며 알뜰한 삶을 산다. 이름대로다.

한글의 눈물겨운 역정. 사대부와 유생이 한글창제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세종대왕의 지극한 애민 철학이 없었던들 한글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반포되고도 언문(諺文)으로 천대받았다. 일제가 한글을 엄금했다. 광복되어 한글 전용 법률이 공포되었는데도 호적 계장은 나 몰라라했다. 컴퓨터시대인 지금에 와서야 한글은 세계를 섭렵하는 문화유산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다.

둘째는 아들이다. 한결이다. ‘한결같이’ 변함없이 살면 아비보다 ‘한결 낫다’라는 염원에서다. 이름대로 애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키도 크고 준수하고 학문도 깊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한결같이 노력해 미국에서 고답한 철학교수가 됐다.

40대 중반이니 세상을 즐기며 살 수도 있으련만 자신의 학문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연구와 강의에 몰두한다. 아득히 멀고 고달픈 학문의 길이 언제까지일까? 평생 남편 뒷바라지만 할 며느리는 안쓰럽고…

첫 손녀가 태어났다. 다슬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신을 스스로 잘 다스려 건강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라고… 다슬이는 초등학교 4개월을 다니다 미국엘 갔다. 처음엔 영어를 말할 줄도 알아들을 줄도 몰라 외톨이었다. 스스로를 잘 다스려 중학교 1학년에서 최우등생이 됐다. 다슬이가 ‘다슬’ 뜻을 마음에 새겨 자신을 다스렸나 보다.

둘째 손녀의 이름은 다를 항렬자로 해서 다해다.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그래선지, 다해는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글도 모르는 애가 책장을 넘기며 글 읽는 시늉을 한다. 연필로 글 쓰는 흉내를 낸다.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다고 색색으로 황칠을 한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책을 술술 읽었다. 언니하고 다툴 때면 영어를 쏟아내 언니가 감당을 못한다.

셋째 손녀는 다함이다. ‘다함께’란 뜻이다. 언니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얼굴을 비벼대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강아지처럼… 유별나게도 두 언니를 따른다. 세 자매가 다함께 헝클어져 시끌벅적하다.

세 손녀가 모두 함께 스스로를 다스리고 최선을 다하면 태산도 옮길 수 있으리라. 할아버지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아쉬운 게 있다. 내 가계(家系)가 아니라 외손녀 둘에게 한글 이름을 못 지어준 게… 외손녀까지 한글이름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과학적이고 창의적이고 미학적인 한글로 애들에게 예쁘고 뜻이 깊은 한글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대로 잘 자란다. 한글날에 즈음하여 세종대왕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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