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北歐)의 여인들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1975년 8월 초. 오슬로대학 기숙사에 여장을 풀었다. 시차적응이 안 돼 잠이 오지 않았다. 밤12시인데도 하늘이 희부옇다. 이를 백야라 한다. 그러다 추분을 지나면서 하루가 다르게 밤은 길어지고 낮은 짧아졌다. 동지쯤엔 노르웨이의 북극권은 밤이 계속된다. 최남단에 위치한 오슬로도 진눈깨비가 내리면 대낮인데도 가로등이 거리를 밝혀주었다.

그들의 조상은 viking〮이다. 8~11세기에 뛰어난 항해술로 전쟁과 약탈을 일삼던 해적이었다. 기나긴 겨울밤과 한랭하고 메마른 땅을 벗어나 햇빛 찬란하고 비옥한 땅을 찾아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북아메리카를 침략했다.

남자의 90%가 바다로 나갔다. 인구 4백만 명의 소국이지만 1970년대에 영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3대 해운국가였다. 바다로 떠난 남자들의 빈자리를 여자들이 채워서인지 직업여성단체 소로프터미스트클럽의 활동이 활발했다.

밤이 길어지면서 소로프터미스트 클럽에서 유학생을 가정으로 초대했다. 클럽회원과 유학생이 반반으로 섞였다. 거실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인사를 나누다 식당으로 옮겼다. 식탁에 촛불을 켜놓고 피부색이 다른 여러 얼굴들이 모여 있는 분위기는 야릇했다. 식사가 끝나고 거실로 돌아와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음에 맞는 사람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순백의 눈이 내리는 밤, 모피모자에 부츠를 신고서 롱코트를 입은 윌헮센이 북경반점 밖에서 눈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낭만적이었을까. 그녀 어깨 위에 내린 눈을 털어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몇몇 커플이 조용히 담소하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널따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균형 잡힌 몸매, 금발 아래에 파란 두 눈, 그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오독한 코. 창밖에 내리는 눈은 배경이 되어 그녀는 환상적인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다음 금요일, 나는 그녀의 집으로 초대받았다. 간편한 의상에 엷은 화장을 하고서 동방의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거실에 세워둔 바이올린이 눈에 띄었다.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약사였다. 서가엔 의약서적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기품 있는 분위기였다. 정성을 곁들인 식단이 훈훈했다.

어쩐지 그녀는 고적해 보였다. 노라가 연상됐다. 노르웨이 문호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는 가정을 뛰쳐나갔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결혼 후에도 남편의 일방적인 보호와 사랑에 자신은 한낱 인형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 살고 싶었다.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남편과 아이들, 모두를 버리고 인형의 집을 떠났다.

조선의 여인들이 여필종부를 천부의 계율로 알고서 남정네의 학대와 성노리개로 살던 시대에…. 입센은 <인형의 집>을 통해 여성을 해방시킨 혁명가였다. 허지만, 가족 없이 살아가는 노라의 후예들이 진정으로 행복할까?

겨울방학 때 스키캠핑을 갔다. 오슬로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4시간을 달렸다. 온 누리가 은빛이었다. 띄엄띄엄 있는 집들이 눈에 파묻혀 졸고 있었다. 크고 작은 호수들은 눈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개가 끄는 스키에 몸을 싣고 설원을 하염없이 달리는 북구의 정경. 동화가 실화로 전개되는 태고연한 설경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산골짜기로 접어들면서 가파르게 굽이치는 눈길을 달려가는 운전솜씨에 경탄했다. 차창너머 낭떠러지를 보면 현기증이 났다. 산을 넘고 또 넘어 첩첩 산중 스키캠프장에 도착했다. 그길 <와달>이라 했다.

캠프장 아래에 호수가 있었다. 호수 주위를 둘러싼 산들이 스키트랙이었다. 해외협력처의 미스 안데르센은 클로스컨트리 스키장구로 완전무장을 하고선 먼 길을 떠난다고 했다. 싱긋 웃으면서 같이 가겠느냐고 농담을 걸어왔다. 나는 짐짓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캠프장 주위에서 스키를 타다 지치면 호텔 창가에 앉아 이런저런 공상에 잠겼다. 내가 깊은 계곡에서 눈에 파묻혀 죽는다면, ‘봄은 가고 또 가고/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고/ 세월은 가고 또 가/…’라고 노래한 솔베이지처럼 내 아내도 호호백발이 되도록 나를 기다려주려나!

그리그의 솔베이지송은 방랑의 길을 떠난 페르가 돌아오기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영원한 사랑의 노래이다. 페르는 육신과 영혼이 병들어 솔베이지의 품으로 돌아와 운명한다. 솔베이지는 청순한 사랑으로 페르의 방랑과 방탕을 감싸준다.

눈 덮인 산에 오르면 입센과 노라, 그리그와 솔베이지가 생각난다. 37년 전의 윌헮센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되돌아 갈 수 없는 북구의 정경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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