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저편에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인천항을 2011년 10월 18일 오후 5시에 출항한 카페리가 밤을 새워 항해해 이튼 날 아침 8시에 대련항에 입항했다. 옛 직장 동료들과 함께 버스로 갈아타고 여순감옥으로 이동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형극의 삶을 살다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의 영전에 머리를 숙였다. ‘너는 무얼 했느냐’란 질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버스는 방향을 바꾸어 단둥으로 달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 밭을 차창 너머로 바라봤다. 독립투사들이 풍찬노숙하며 이 길을 오고가셨을 것이다. 나는 사치스럽게 관광을 하고 있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가 저물어 압록강 강변도시 단둥에 도착했다. 거리에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뒤엉켜 넘쳐흘렀다. 고층빌딩과 상가에서 내뿜는 휘황찬란한 불빛은 불야성이었다. 중국의 변방도시인데도.

그런데 압록강 저편은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한반도 북문(北門)이며 국경의 제일도시였던 신의주는 캄캄한 강촌이 됐다. 수 천리 뱃길과 찻길을 돌아와 압록강 저편 내 땅에 발을 디딜 수 없어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서글펐다.

다음날, 단둥 선착장에서 소형선박에 탑승했다. 북한 땅을 끼고 압록강 서쪽으로 항행했다. 민둥산 꼭대기와 중턱에 있는 허름한 경비초소들이 압록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변을 서성거리던 초췌한 몰골의 군인들이 사진을 찍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배 없는 선착장은 폐가처럼 적막했다. 방파제가 동강나 절반은 물속에 잠기고 절반은 하늘을 쳐다보며 ‘왜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느냐’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

돌아올 때는 우적도를 끼고 항행했다. 수확의 계절에 분주히 움직이어야 할 농부들은 보이지 않고 정치구호 간판이 눈에 뜨였다. 농촌이 참 을씨년스러웠다. 한 여인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탄 배를 흘깃 보고는 못 본 척 빨래를 계속했다. ‘나도 저 배를 타고 자유롭게 멀리멀리 가봤으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왠지 빨래하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어렸을 때 내 고향 시냇물에서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던 동네 누나의 모습과 겹쳐서일까?

북한 동포들이 압록강을 몰래 건너올 만한 단둥 강변에는 철조망이 앙칼지게 버티고 있었다. 온갖 짐승들은 오고가건만 북한 동포들만 건널 수 없다. 철의 장막이 따로 없다. 남으로도 비무장지대 철조망이 반도의 허리를 잘라 북한 동포는 고도(孤島)에 갇혀버렸다. 거대한 도가니 속에서 질곡과 기아로 신음하고 있다.

옛날 고구려 백성들은 장보러가고 시집장가 가느라 나룻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을 것이다. 피가 섞이고 문물을 교류하며 강성해진 고구려는 동북아를 호령했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수레바퀴를 피할 할 수 없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구려 조상들은 지하에서 북한의 참상을 무어라할까?

북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는 그 자리에서 공연을 봤다. 여자 7인조가 오르간, 아코디언, 만돌린을 연주하면서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라고 열창했다. 보기 드문 미인들이었다. 남남북녀라 하지 않았던가? K-pop이 파리 런던 뉴욕에서 세계를 열광시키는데 외화 벌이를 위해 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볼품없는 공연을 하는 그들이 내 혈육인양 마음이 저렸다.

다 다음 날, 압록강 철교를 걷다가 중간쯤에서 되돌아와야만 했다.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신의주 쪽으론 상판은 날아가고 교각들만 앙상하게 남아있어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 바로 옆에 중국이 새로 건설한 철교에 기차와 자동차가 지나갔다. 단절된 철교를 보수하면 될 텐데 그대로 두고서 왜 새로 건설했을까. 60년 넘도록 험상궂게 방치한 것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잊지 말라는 웅변일까?

압록강은 인간세상이 야속스럽다는 듯 말없이 황해로 흘러간다.  남한도 고도이긴 마찬가지이다. 비무장지대 철조망이 가로막혀 광활한 대륙으로 달릴 수 없다. 동서남 3면은 망망대해로 둘러싸여있다. 허지만, 바닷길과 하늘길은 종횡무진으로 뻗어있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철조망을 걷어내고 우리민족이 남과 북으로, 대륙과 바다를 통해 세계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날이 언제 오려는지!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