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피아노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나에게도 高3시절이 있었다. 55년 전에.
학교와 집을 오고가며 한 눈 팔지 않고 대학입시에 열중했다.
그러다 일요일이면 책을 덮었다. 안식일이라서.
오전엔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기고 학생신앙운동을 했다.
오후엔 교외로 나아가 산과 들에서 싱그러운 공기를 마셨다.
어느 일요일, 사직공원 넘어 미션스쿨인 수피아여고 옆길을 걸었다.
학교 담장 너머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와 가던 길을 멈췄다.
곡명은 모르지만 감미로운 선율이 가슴을 적셔주었다.
어느 선교사 부부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리라고 상상을 했다.
부인은 건반을 두드리고 선교사는 그 옆에서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겨주는 정겨운 장면. 세상사에서 벗어난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시간. 두고 온 고국을 그리며 향수를 달래는 낭만.
이렇게 내 멋대로 그려보며 나도 훗날 선교사 부부처럼 음악이 있는 가정을 꿈꾸었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나 결혼을 했으나 그 꿈을 못 이루었다.

첫 딸을 낳았다.
친척과 친지들이 아이에게 과자 값을 손에 쥐어주곤 했다.
그 돈으로 집 가까운 은행에 아이 이름으로 저금통장을 만들어주었다.
아이는 엄마를 졸라 날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들고 은행엘 갔다.
은행창구가 높아 꼬맹이 얼굴은 보이지 않고 통장을 내미는 고사리 손만 보였다.
은행이 꼬맹이 고객을 귀여워 해 받침대를 만들어 주었다.
받침대를 딛고 올라선 꼬맹이 고객에게 행원들이 손을 흔들며 반겨줬다.
자기를 반겨주는 것이 좋아선지 아침부터 은행에 가자고 졸랐다.
요일 개념이 없어 일요일에도 은행에 가겠다고 떼를 썼다.
어쩔 수 없이, 은행으로 데려가 문이 닫혀있는 것을 보여주곤 돌아왔다.

동네에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싫다지 않고 혼자 바이엘 교본을 옆구리에 끼고 하루도 빠짐없이 레슨을 받으려 다녔다.
어린이 피아노 발표회에서 지정곡을 치고서 내려와야 하는데 그 곡을 계속 쳤다. 레슨 때처럼 계속 쳐야하는 줄 알고.
선생님이 “이제 그만 내려가야지”란 말에 멋쩍어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천진함을 보고 웃음바다가 됐다.
<호두까기인형>음반을 틀어놓으면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까치발을 하고서 제법 엄마 흉내 냈다.
음정이 발달되었음인지 리듬에 맞춰 손발을 놀려 인형처럼 귀여웠다.

저금통장에 들어있던 돈을 보태어 피아노를 사주었다.
초등하교 2학년 때 신문사 콩쿠르에서 입상하여 재능을 인정받았다.
간단한 작곡도 했다.
내가 작사한 <행복한 우리 집>에 딸이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었다.
딸의 반주에 맞추어 아들과 아내 그리고 내가 가족함창을 했다.
내 고교시절의 꿈을 이루었다.

딸의 딸은 어미를 따라 피아노를 하다가 첼로로 바꿨다.
예술의 전당에서 예원학교 오케스트라 졸업연주를 했다.
첼로를 하는 학생들은 객석 쪽으로 두 줄로 자리를 잡았다.
무대 가까이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손녀가 생긋 웃었다.
‘그래, 너 참 장하다’는 마음으로 손을 흔들어 답했다.
핏덩어리가 커서 무대에 서다니! 흐뭇해 콧등이 찡했다.
지금은 예고학생이 되어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손녀와 데이트를 하기로 날짜를 잡았는데도 손녀가 레슨을 받느라 바빠 몇 번이나 펑크를 냈다.

나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음악에 접근도 못했다.
일제의 약탈, 남북분단과 6∙25전쟁의 시대를 사느라 음악은 사치였고 그림에 떡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 학급에 음악을 했던 친구가 둘뿐이었다.
하나는 바이올린을 했다. 휴식시간에 모여앉아 그의 바이올린을 들었다.
그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또 하나는 피아노를 했다.
새벽에 몰래 음악교실 문을 따고 들어가 피아노를 치다 숙직 선생님께 들켜 호되게 질책을 받았다.
지금은 웬만한 집에는 피아노가 있지만 그때는…

세계적인 음악가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트리오가 그들의 어머니를 대한민국 음악의 모태라고 칭송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에 세 남매를 미국으로 유학시켜 세계적인 음악가로 만들었으니.
그 어머니가 한국의 엄마들에게 음악의 열정에 불을 댕겼다.
클래식음악의 올림픽이라는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총 19명이 입상했다. 그중, 한국인 5명이 노른자위 부문에서 상위권을 휩쓸었다.
미국국적으로 참가하여 2등을 했던 정명훈과는 달리 그들은 당당하게 한국국적으로 참가했다.

유럽에서 음악천재들이 황실과 귀족, 성당의 뒷받침을 받아 악성(樂聖)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엄마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국제적 음악가를 배출했다.
엄마 치마 바람이 거세다고, 엄마의 대리만족이라고 폄훼들 하지만, 그래도 엄마들의 극성이 있었기에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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