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 김문호 한일상선 대표
반도 중허리의 겨울은 길고도 삭막해서 웬만한 뚝심으로는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삼월도 중순을 넘었건만 천지에는 회색의 냉기뿐, 봄의 기색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가끔은 제법 도타워진 햇살이 성급한 기대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밤의 한기는 지나온 삼동(三冬)을 도리어 무색케 하면서 새봄에의 감지를 매섭게 시새움 한다.

그럴 때면 외포리를 찾을 일이다. 그곳 남서쪽으로 열린 작은 바다와 올망졸망 낮은 섬들 앞에서 가슴을 펴면, 겨우내 움츠려들었던 숨통이 조금은 열릴 것이다. 남녘 초록 뱃길 위의 섬들이야 이미 물오른 난대림에 끝물 동백이 꽃비로 쏟아지겠지만, 해마다 그런 봄맞이의 호사가 쉬운 일이던가.

한나절이면 다녀올 만한 지척에 외포리가 있음은 축복이다. 그곳의 삼월 역시 서울의 그것과 대차 없는 회색빛 외양이긴 하지만, 갈매기의 나래 짓에 실려 오는 바람결과 맞은편 석모도(席毛島)를 오가는 도선(渡船)들의 물이랑에는 어느덧 적잖은 봄의 훈기와 빛깔이 배어 있었다. 잔파도가 찰싹이는 물기슭 양지받이에는 노란 꽃다지와 보라색 제비꽃도 저들끼리 남모르게 어우러져 있었다. 이들 이파리 하나를 뜯어서 코에 대고 숨을 들이키면 폐부 깊숙이 꽂히는 햇잎의 향기에 밑바닥 숨결이 툭 터지는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봄은 물길로 찾아오는 이치였다. 어릴 적 고향에서도 겨우내 얼어붙었던 동네 큰못이 초록 물결로 남실대면 어느새 봄이었다. 뒤이어 물 잡은 못자리들이 아침저녁 비낀 햇살에 거울처럼 반짝이고 물꼬마다 개구리 알이 꽈리처럼 부풀면, 뼘 자란 보리밭가의 살구꽃이 벌겋게 피어올랐다. 그래서 선인들도 전원의 사계(四季)를 노래하면서 봄은 ‘연못마다 가득한 물(春水滿四澤)’로 읊었던가.

외포리의 봄은 주꾸미의 별미로도 찾아온다. 어물전 망신의 꼴뚜기에 대차 없는 녀석들의 제철이 삼월이다. 겨우내 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죽은 듯 지내던 놈들이 계절 감각만은 남달라서, 마파람이 불어왔다 하면 떼거리로 떠올라서 겁 없이 몰려다닌다. 주체할 수 없는 생식본능의 발로다.
물미역 냄새가 짙은 그것들을 햇미나리와 함께 데쳐서 한 마리씩 집으면 외포리의 봄 향기가 전신으로 퍼진다. 거기에 소주잔을 곁들인다면 웬만한 인동(忍冬)의 비애쯤이야 준비 없이 찾아간 주머니사정으로도 너끈히 날릴 만하다.

이런 때면 바다로 난 통유리창가에 자리를 잡을 일이다. 그곳의 하늘, 섬, 바다가 엮어내는 삼단 풍경 속으로 갈매기 떼의 군무가 펼쳐든다. 삼월 들면서 눈에 띄게 불어난 개체수다. 이들 또한 번식의 계절이어서, 꼬리치며 달아나는 암컷에게 수놈들이 따라붙는다. 시종 시치미를 떼던 암놈이 못 이기는 척 응낙의 자세를 취하면 해면과 선착장, 지붕과 담장을 가리지 않고 교미를 해댄다. 철 따라 떠도는 삶이긴 하지만 번식의 춘정만은 거를 수 없다는 필사의 본능이다.

이미 수태를 했거나 귀향의 발길이 느긋한 놈들은 인근 섬을 넘나드는 도선들의 고동소리로 몰려든다. 선객들이 뿌려대는 새우깡 부스러기를 좇는 수백 마리가 출항선의 항적(航跡) 위에 북새판을 이룬다. 목청까지 돋우어 달려들고 물러서면서 날렵하게 돌아난다. 물고기를 노려 살처럼 내리꽂히는 직선비행이 주특기인 그들로서는 엄청나게 숙달된 후천의 곡예비행이다.

객선이 수로의 중간을 넘어서면서 승객들이 보시(布施)의 손을 털면 갈매기들은 다시 외포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바다를 자맥질하지는 않고 선착장 기슭이나 횟집 창가에 앉아 몸을 말리면서 다음 출항선의 고동소리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장삿속의 볼거리를 연출하는 식당 주인이 회를 뜨고 난 잔해더미를 창가에 내다 뿌리면, 솜털 속의 성기마저 스스럼없이 드러내면서 통유리로 달라붙는다. 편하게 먹고살기에 이골이 난 놈들이다.

다수의 괭이갈매기에 등이 검은 ‘큰재갈매기’, 부리와 다리가 붉은 ‘붉은부리갈매기’가 격의 없이 어울린다. 이들 중 뒤의 두 종족은 더위가 나기 전에 오오츠크나 알류산, 배링 해를 넘어 알라스카 아니면 캐나다의 서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삼월의 외포리에서 회임한 새 생명을 사월의 그곳 고향에서 낳아 길러야 한다.

짙은 회색 등에 노란색 다리와 검은 꼬리, 긴 부리 끝의 검고 붉은 점으로 식별되는 괭이갈매기만 외포리에 남는다. 서양인들은 ‘검은꼬리갈매기(Black tailed gull)’, 일본에서는 우는 소리가 고양이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해서 ‘바다 고양이(그들의 말로 ’우미 네코‘)’라고 부르는 동북아의 텃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매에 고기떼를 좇는 눈이 밝아서 전통 어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해 온 우리의 갈매기다. 한반도 남․서해안의 무인도와 동해의 독도가 그들의 주 산란장이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로상의 갈매기들은 인근 육지의 인종을 닮아 있었다. 북태평양 중위도(中緯度) 수역의, 독수리처럼 크고 우악스런 놈들은 바로 검붉은 거구의 폴리네시아인들의 형상이었다. 캘리포니아반도 연안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히고 솟구치는, 작고 검은 제비갈매기는 영락없는 멕시칸들의 날렵한 자태와 동작이었다. 일부변경선을 서쪽으로 넘는 귀로의 항해에서 몸과 마음이 쳐질 때쯤, 비둘기처럼 곱고 아담한 괭이갈매기가 수평선에 출몰하면 이내 환희의 모항(母港) 귀환이었다.

그런 정분 탓인지는 몰라도, 갈매기가 있는 바다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겨울은 막 끝났지만 철새 갈매기들도 아직은 돌아가지 않은 채, 번식의 군무가 활발한 삼월의 해변풍경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이때쯤이면 봄을 기다리는 내 인내력도 고갈의 위기를 맞게 되므로 이래저래 외포리를 찾게 된다.

아직은 차가운 바닷바람 앞에서 내 젊은 항해시절을 갈매기의 비상에 띄워 보는 회상이 감미롭다. 거기에 봄 주꾸미와 햇미나리를 곁들인 소주의 취흥이 이제는 긴박할 것 없는 내 시간에의 과분한 사치라 할 만하다.

외포리의 갈매기들을 업신여긴 적도 있었다. 물고기사냥 대신 손쉬운 과자 받아먹기로 체중만 늘리다가는 언젠가 멸종의 화를 맞으리라 경멸했다. 길지도 않은 뱃길에 다리가 놓이거나, 생각 없기로 갈매기와 다를 바 없는 승객들의 헐한 동정이 끊기는 날이 바로 그날이리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젊은 혈기의 치졸한 판단이었다. 자동차의 편리를 밝히다가는 앉은뱅이가 되리라는 식의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생존은 환경의 편의에 최대한 밀착하는 것.

식당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여인들이 우리말에 혀가 짧다.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건너온 동포들이다. 활기차게 일하는 그들의 모습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그들 또한 삶의 편의를 좇아온 외포리의 철새 갈매기들인 것.

젊은 날의 벅찬 항해에서 이제는 풍파가 없는 육지로 돌아와 앉아, 때때로 바다가 그리운 나 역시 영락없는 한 마리의 갈매기인 것을.(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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