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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 善, 美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美를 택한다. 美, 즉 아름다움을!

자연과 인생, 예술에 담긴 아름다움의 본질과 구조를 연구는 학문을 美學(aesthetics)이라 한다. 미학을 플라톤은 초월적 가치로 보았고, 칸트는 경험에 의한 감성적 현상으로 탐구했단다.

문외한인 나로선 대철학자의 미학이론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저 아름다움이 좋다. 음악, 미술, 무용이 아름답다. 감미로운 선율, 환상적인 색상의 조화, 비상하는 율동에 매혹되어 세상 번뇌는 사라지고 삼매경에 빠진다.

절세미인이 아름답다. 허나, 추한 여인에게도 모성의 아름다움이 있다. 빈민들의 고달픈 생활에는 인고(忍苦)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들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지하철 앞좌석에 앉은 어르신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얼굴에 주름살이 깊다. 옷차림도 허름하다. 세상풍상에 짓눌려 어깨도 허리도 구부정하다. 외로움에 지친 모습이 애련(哀憐)하게 아름답다.

독서실에서 먹고 자며 허드렛일을 하다 S대에 합격한다. 이 영광을 어머니께 바치려고 달려간다. 난장에서 쭈그리고 앉아 찬밥 한 덩어리로 허기를 달래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혹한을 견뎌낸 인동초(忍冬草)처럼 아름답다.

소아마비 형이 그 동생을 리어카에 태우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부자연스러운 손발을 휘두르며 시장을 휘젓고 다닌다. 환호성으로 야단법석이다. 순정(純情)이 아름답다.

가시고기는 부성애(父性愛)의 상징이다. 이른 봄, 바다에서 하천으로 올라온 가시고기는 둥지를 틀고 산란을 한다. 암컷은 알을 낳고는 둥지를 떠난다. 수컷이 홀로 남아 알을 잡아먹는 침입자를 물리치며 알이 부화되도록 지느러미로 끊임없이 부채질을 한다.

먹지도 쉬지도 않고 새끼들을 돌보느라 주둥이가 헐고 만신창이가 되어 숨을 헐떡거리며 죽는다. 아빠의 시체를 갈겨먹고 자란 새끼들은 아빠의 앙상한 뼈만 남겨둔 채 먼 바다로 떠난다. 아낌없이 내어준 아빠 가시고기의 희생이 아름답다.

이 땅의 아버지들도 모든 것을 내어준 자식들을 향해 ‘몸은 떠나도 마음만은 남겨두지’라며 아쉬움을 속으로 삭힌다. 잎도 가지도 홀랑 벗어 버리고 알몸으로 한추위를 버티는 고사목처럼 마음마저 비워버린 아버지의 적막감이 슬프도록 아름답다.

야생화 사진작가의 이야기다. 곡괭이로 파도 안 들어가는 땅을 여린 복수초가 뚫고나와 눈 속에서 꽃을 피운다. 바깥 온도는 영하 2도인데 꽃술 안을 온도계로 재어보니 영상 12도이다. 하얀 눈 속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샛노란 복수초는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그 신비로운 찰나를 표착하기 위해 텐트를 치고 며칠을 카메라와 씨름하는 작가의 인내가 더욱 아름답다.

‘美’는 ‘羊’과 ‘大’의 회의자(會意字)이다. 美는 광활한 초원에 양들이 큰 무리를 지어 풀을 뜯어먹으며 노니는 목가적(牧歌的) 아름다움이 연상된다.

하여, 나는 眞이나 善보다 美를 한결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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