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으면 떠오르는 진주들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지난 여름.

끝없는 해변에 피서객들이 들끓는다. 미국 동북부 휴양도시 애틀란틱 시티(Atlantic City)이다. 대서양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모래 위에 뒹굴며 태양에 살결을 내맡긴 미끈한 인어(人魚)들, 파도를 타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젊은이들, 들꽃들이 만개한 듯 형형색색의 비치파라솔 아래서 직사광선을 피하는 애기들과 노인들, 먹고 살기 위해 행상을 하는 서민들, 갖가지 피부색과 각양각색의 인간시장이다.

비치파라솔을 벗어나 손녀 다슬이 손을 꼭 잡고 바닷물을 찰싹찰싹 밟으며 걷다가 상가로 나간다. 해수욕장과 상가의 경계는 빗살무늬 바닥의 나무다리다. 맨발로 걷는데 발바닥 촉감이 좋다.

다슬이가 노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빨아먹는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귀여울까! 석양에 반사된 얼굴이 금빛 진주다. 베르메르의 명화 ‘진주귀고리 소녀’의 금빛 진주처럼 영롱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가족들은 잠자는데 나 홀로 호텔을 빠져나와 바닷가로 간다. 대서양이 창창하게 에워싸고 있다. 수평선이 아주 완만하게 아치곡선을 그린다. ‘지구가 둥글어서일까? 마젤란이 저 수평선을 넘어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증했을까?’라고 중얼거리며 걷는다.

소란스럽던 어제와는 딴판이다. 모래찜질을 하거나 모래성을 쌓느라 파헤쳐 울퉁불퉁하던 모래밭을 청소차가 간밤에 써레질을 했음인지 가지런하다. 여기저기 뒹굴던 쓰레기를 말끔히 치워 모래가 은빛이다.

잔잔한 파도소리뿐 소음도 없다. 깊숙이 숨을 들이킨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폐부를 꿰뚫고 모세 혈관으로 스며든다. 날아갈 듯 상쾌하다.

인적도 드물다. 멀리서 체조하는 사람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간다. 바닷물이 다져놓은 가장자리에서 흑진주처럼 새까만 여인이 춤을 춘다.

거추장스럽다는 듯 무대장치와 음악, 의상과 토슈즈를 제쳐둔 채, 파르르 날갯짓하는 물총새처럼 경쾌하게 발레를 한다. 갈매기들이 흑진주 머리 위로 날아든다. 깔깔거리며 합창하고 날개를 너울거리며 군무로 화답한다.

파란 하늘, 검푸른 바다, 은빛 모래, 갈매기 합창과 군무로 어우러진 장엄한 대자연의 무대에서 흑진주의 발레는 환상적이다. 꼭 30년 전, 모스크바 클레물린 궁에서 관람했던 볼쇼이발레 ‘백조의 호수’에 출연한 프리마 발레리나가 이보다 환상적이었을까!

필라델피아로 돌아온다.

성당에서 다슬이가 십자고상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사제를 향도하여 제대로 나간다. 파란 눈과 은빛 머리칼의 사제를 받들어 미사복사를 하는 다슬이가 천사인양 아름답다. 나는 제대 아래서 ‘하느님! 저의 금빛 진주 다슬이를 보호하소서’라 기도한다.

다슬이와 3주를 지내고서 귀국할 때, 내가 27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십자가 금목걸이를 다슬이 목에 걸어주며 “잘 간직하다 먼 훗날 네 아이에게 줘라”고 했다. 다슬이는 나를 꼭 껴안고 “할아버지, 한국에 안 가면 안 돼!”라며 흐느낀다.

내가 귀국하고 다슬이가 이메일을 보냈다. 읽을수록 가슴이 저려온다.

Dear Grandpa

I really miss you! I've felt so lonely ever since you left and I miss you more and more everyday. Whenever I go to sleep at night, I miss you being there right next to me.

Your picture and cross necklace are sitting on my desk and I look at them everyday.

I love you and I'll see you soon!
With love,
Daseul

두 눈을 꼭 감으면 금빛진주와 흑진주가 떠오른다. 그 여름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 한가운데서 눈처럼 그리움만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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