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나의 배역(配役)은…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은퇴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여생이 보람될까 하고.

문둥이에게로 다가가 그들의 애환을 기록하기로 했다. 성라자로마을에서 나환우와 함께 밥을 먹고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눈물어린 서러움을 들었다. 배고파 ‘밥 한 술 주소’하면 재수 없다고 소금 뿌리고, 침 뱉고, 부지깽이로 쫓아냈다. 부모형제마저 나병이 집안의 수치라고 사망신고를 해 살아있어도 저승귀신이 됐다.

신부님을 수행해 만주, 인도, 월남, 네팔 등 후진국을 찾아갔다. 열악한 환경에서 처참하게 살아가는 나환우들의 뭉그러진 손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기엔 내가 턱없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내 됨됨이 그렇지를 못해 부끄럽게도 돌아서야만 했다.

새 길을 찾아 방황했다. 일본 공무원은 퇴직하고서 책 한 두 권을 남긴다. 세계기록문화의 으뜸인 조선왕조실록의 후예인 우리들은 그렇질 못하다. 공직(公職)을 수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체험들을 기록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옛 기억들과 기록들을 끄집어내 뒤집어보고 꿰매어 <되돌아본 海運界의 史實>을 펴냈다.

한민족은 바다와 더불어 살아왔다. 상고시대엔 통나무를 타고서 어패류를 채취했고, 삼국정립(鼎立)시대엔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바다를 건너 중원을 다투어 드나들어 조공무역이 발달됐다. 통일신라시대엔 장보고란 해왕신(海王神)이 동북아 바다를 장악하고 인도양을 넘어 중동까지 항해했다.

하지만 조선조 사대부들은 바다와 벽을 쌓고 안방에서 티격태격하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제는 우리민족을 가두어두기 위해 조선해운(朝鮮海運) 말살정책을 펴 우리해운은 황폐됐다. 광복 후 선각자들이 바다를 개척해 세계 5위 해운국가로 도약했다. 그 과정을 <船舶行政 變遷史>에 담았다.

해운에 열정을 바쳤던 선각자 100명의 삶을 탐색하면 해운현대사의 공식, 비공식은 물론 숨은 이야기까지 캐내리라 생각했다. 내 체력의 한계로 아쉽게도 50명으로 끝내고 <영예로운 海運人들>을 발간했다. 나머지는 후배들이 계승해 주리라 믿고.

해운관련 자료들을 들추어내어 정리하고 꿰매어 다리미질하며 12년간 쓴 책 세 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뿌듯하다. 또한 ‘해기사 명예의 전당’ 건립에 자료가 됐다. 현재 그곳에 안치된 해기사 여덟 분의 흉상들이 후진들에게 ‘조국의 해운발전을 위해 더욱 정진하라’는 듯 창창한 바다를 바라본다.

어언 여든 고개를 바라보게 됐다. 자신을 되돌아볼 때다. 내가 누구일까 하는 회의와 겨울 들판에 홀로 서성거리듯 외로움이 밀려왔다. 순간순간 상념들을 막사발이 속살을 들어내듯 붓 가는대로 진솔하게 쓰기로 했다.

돌아보면 인생은 연극이란 생각이 든다. 배우가 극본에 따라 무대에서 말과 몸짓으로 연기를 하듯, 인생은 섭리에 따라 웃고 울며, 희망과 절망, 좌절과 인내를 반복하며 인생연기를 한다.

모든 배우가 자기가 원하는 배역을 맡을 수 없듯 인생도 그렇다. 배역은 연출가의 몫이다. 인생배역은 신의 섭리가 아닐까. 주연이든 조연이든 단역이든 극본을 소화하여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내가 맡았던 인생배역의 단상들을 모아 <저녁노을 바라보며>란 해양수필집을 발간했다.

오직 오늘만을 위해 인생항로를 항해했다. 어제는 가버린 오늘이고 내일은 닥쳐올 오늘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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