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강산에 나 홀로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섣달그믐이다.

비둘기 한 쌍이 꽃 두 송이를 물고와 적막강산을 훤하게 밝힌다. 딸 식구들이다. 별일 없었나하고 사위와 딸, 두 외손녀가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핀다. 별안간 집안에 생기가 넘친다.

푸짐한 식탁에 대화도 푸짐하다.

딸이 첫째 외손녀가 새해에 고3이 되어 자기 인생은 없다고 푸념을 한다.

첫째 외손녀는 학교공부에다 첼로 레슨과 과외 수업까지 눈코 뜰 사이 없는데 엄마의 채근이 심해 숨도 못 쉬겠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나는 안쓰러워 등을 다독거려준다. 울음을 그치고는 “대학 들어가면 운전면허증 따서 친구들과 여행 다녀야지! 할아버지랑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란다. 엄마에 대한 은근한 반항이다. 공부에 빼앗긴 자유를 찾으려는 갈망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외손녀는 학교수업이 끝나면 엄마들이 자기 아이와 동무해 달라고 서로 자기 집으로 데려간단다.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으쓱댄다.

사위가 “설을 맞으시니 생각이 많으시지요?”란다. 내 딴엔 성실히 살았는데 이제 적막강산에 나 홀로인 것 같다. 나만 이런 생각일까? 성경에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 했다. 동서고금 인생무상을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을까? 나도 탄식이 절로 흘러나온다.

명절인데 아들과 멀리 떨어져있는 내가 쓸쓸하게 보였음인지 딸이 스마트폰을 열어 아들식구들 사진을 보여준다. 친손녀 셋과 아들과 며느리 다섯이 이런저런 포즈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들을 스마트폰에서 불러낸다. 온 가족이 식탁 주위에 빼곡히 둘러앉는다.

첫째 친손녀가 “할아버지, 나 또 Distinguished Honers(최우등생)됐어. 상 주세요”라며 나에게 찰싹 기댄다. “그래그래, 주고 말고”라 답한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했을 때, 영어를 몰라 학교에서 외톨이였었는데 최우등생이라니! 참 장하다.

둘째 친손녀는 “할아버지, 컴퓨터 사 주세요. 나도 언니처럼 할아버지께 이메일 할래요”란다. 고것이 첫돌을 갓 지나고서 떠났다. 벌이 꿀주머니를 찬 듯 귀저기를 차 볼기를 뽈록 내밀고 공항 로비를 뒤뚱거리며 걷던 것이 이메일을 하겠다니! 세월이 무정하게도 빨리 흘러간다.

며느리는 “아범이 미국에서 교수로 살아남으려면 실력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정말 무섭게 공부합니다”라고 남편을 치켜세운다. 아들은 며느리 말에 아랑곳 않고 사위와 술잔을 나누며 도란거린다. 세 살짜리 셋째 친손녀는 엄마 무릎에서 우리말 반, 영어 반으로 옹알거린다.

설밥상머리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마음 놓고 조잘거린다. 식구들끼리 무슨 말을 한들 흉허물이 되랴. 나는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듯 마냥 즐겁다.

자정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딸 식구 넷, 아들 식구 다섯, 그리고 우리 부부, 모두 열 하나다. 이 방 저 방이 꽉 차 냉랭하던 집안이 사람훈기로 넘친다. 둘로 시작해 열하나로 늘어났으니 농사가 잘 된 셈이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허나, 손자가 없어 아쉽지만 손녀 다섯이 모두 건강하고 예쁘고 개성이 톡톡 튄다. ‘하느님의 은혜가 제 잔에 넘치 나이다’라고 감사기도를 드린다.

설날아침이다.

세배를 받는다. 청마의 기상으로 힘차게 달리라고 덕담을 하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만원씩 세뱃돈을 준다. 고3이 되는 첫째 외손녀에게 “힘내라!”하며 다른 사람들 몰래 봉투를 손에 쥐어준다.

병원에 입원한 장인에게 세배 겸 문병을 간다. 올해 춘추 백세이시다. 말씀도 못하시고 가족들을 알아본 듯 못 알아본 듯 눈만 깜박거린다. 광달거리 너머의 등댓불이 시야에서 사라져가듯 생명의 촛불이 가물가물 꺼져간다. 어깨를 만지니 뼈만 앙상하다. 손가락은 바싹 마른 겨울 나뭇가지 같다. 단단하셨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나의 자화상을 보듯 서글프다.

딸과 아들 식구들이 모두 떠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니 적막강산에 나 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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