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 한일상선 대표

▲ 한일상선 김문호 대표
 일등항해사의 항해 당직은 하루에 두 번, 네 시부터 여덟 시까지다. 소위 새벽의 모닝 워치(Morning watch)와 저녁의 이브닝 워치(Evening watch)다. 새벽 3시 45분경, 이중으로 쳐진 불빛차단 커튼을 헤치면서 조타실로 들어서면 칠흑 어둠이 어찔하게 막아선다. 그러나 자정부터 새벽 네 시까지의 심야당직(Midnight watch)을 서고 있는 이등항해사와 조타수는 어느새 그의 출현을 알아보고 인사를 보낸다.

“굿 모닝, 칩 오피서(chief officer)!”
일등항해사는 그들의 목소리만을 향해 응답한다.
“굿 모닝, 세컨드 오피서 앤 쿼터마스터(second officer and Quarter master)!”

배의 침로와 위치(혹은 추정위치), 바람과 파도의 현황과 날씨 등의 인계가 끝나고 네 번의 타종이 울리고 나면, 깜깜한 조타실에는 일등항해사와 조타수만 남는다. 그러면서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 사람의 눈도 짐승의 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짙은 어둠 속에서도 어느 정도는 볼 수 있는 것. 하루 중 적어도 네 시간은 어둠 속에 서 있어야 하는 항해사들의 눈이 더욱 그런 것이었다.

윙 브리지(조타실 좌우에 날개처럼 붙은 노천갑판)로 나서면 새까만 하늘에 별꽃이 무성하다. 하늘의 시가지 불빛인 양 천공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에 걸쳐진 견우(Altair), 직녀(Vega), 백조(Deneb)성의 삼각형이 뚜렷하다. 영문 별 이름의 알파벳 순서대로의 꼭지각 크기를 지닌 세모꼴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다. 셋 다 붙박이 일등성이기 때문이다.

일등항해사는 다른 항성들도 찾아 나선다. 그러면서 만나는 별마다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새벽 인사를 보낸다. 무한광년 저편에서 망망대해의 뱃길을 안내해 주는 고마운 항성(stars)들. 그처럼 낮에는 잠을 자고 밤중이면 일어나서 길동무를 해 주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한 친구들이다. 밤하늘에 별들이 없다면 야간항해는 얼마나 더 적적하고 답답할까.

별자리에 이름을 붙인 것은 그리스, 혹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목동들이었다던가. 그들도 대양의 항해사들만큼 외로웠을까. 선체는 자동조타기만을 딸깍이면서 저 혼자 밤바다를 내달리고, 쌍안경을 목에 건 채 윙 브리지의 어둠에 묻힌 일등항해사는 망부석인 양 무심하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 섹스턴트(sextant)와 스톱워치를 손에 든 일등항해사의 동작이 민첩해진다. 밤새 길동무였던 별들을 수평선으로 끌어내려 고도를 체크해야 한다. 남․북반구의 밤하늘에는 쉰일곱 개의 항성들이 있지만, 수평선이 보다 또렷한 쪽의 방위각 150도 이내의 고도 40도 언저리의 대여섯 별이면 족하다.

섹스턴트의 망원렌즈에 가둔 별을 수평선에 얹어서 시계추처럼 흔들다가 절묘한 접점에서 고도와 시각을 낚아채야 한다. 고도 1분의 오차는 대략 1해리의 오차를 유발하고, 1초의 시각(時刻) 차이는 5백여 미터의 동서 편향을 가져온다. 별과 수평선이 동시에 보이면서 밤과 낮이 은밀하게 교접하는 순간의 정밀한 작업이다.

각 별의 고도에 그리니치 표준시와 관측자의 눈높이를 대입하면 직선이 하나씩 산출된다. 이론상으로는 곡선이지만, 지름이 막대한 원호(圓弧)의 미분은 완벽한 직선이다. ‘위치의 선(line of position)’이라 부르는 이 직선 위의 한 점이 배의 위치가 된다. 그러므로 두 직선의 교차점이 바로 배의 위치로 맺어진다. 그러나 둘만으로는 미심쩍기에 셋 이상이 동원된다. 대여섯 별빛의 직선들을 도끼날처럼 깍은 4B연필로 제도하면, 바다처럼 텅 빈 공해도(空海圖) 위의 한 점에서 정확하게 합일(合一)하는 감격. 이정표없는 바다위의 배와 나의 좌표다.

밤새 항로에서 벗어난 만큼 배의 침로를 수정하고 나면, 어느덧 우람한 일출이 하늘과 구름, 바다와 선체, 잠에서 일어나는 갈매기의 눈망울을 물들인다. 대양의 일출은 화려하고 장엄하다. 그러나 언제나 심한 갈증을 동반한다. 있을법한 새벽안개, 숲의 계곡과 새들의 지저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대한 목마름이다. 땅에서 태어났으되 타고난 호기심에 떠밀려 바다로 뛰쳐나온 역마살의 원죄다.

일등항해사는 머그잔 가득 원두커피를 냉수처럼 들이켠다. 그러고 나면 폐부 깊숙 니코틴의 흡입이 절실하다. 그래서 대양의 일출은 언제나 짙은 커피 향에 녹아드는 입담배 냄새의 잔치였다.

태양이 저만한 고도에서 가지런한 모습을 갖추면, 어느새 조반을 마친 갑판장이 윙 브리지로 올라와서 갑판원들의 주간작업을 보고한다. 젊은 시절, 일본인들 밑에서 바다를 익힌 뒤, 항로에서 늙어버린 그는 일등항해사를 ‘죠사’라고 부른다. 영어의 ‘칩 오피서’를 일본식으로 줄여 부르는 호칭이다. 뒤이어 삼등항해사의 당직조가 올라오고 여덟 시가 되면, 주갑판은 두드리고 긁어낸 뒤 페인트를 입히는 갑판원들의 작업으로 소란해진다. 항해가 항해사들의 당직에서 당직으로 이어지듯, 이들의 정비작업은 항구에서 항구로 연결된다. 그러면서 날마다 새벽의 위치 확인은 새로운 하루의 벅찬 기대였고, 저녁의 그것은 서럽도록 찬란한 저녁놀 속으로 하루를 잠재우는 숙면의 보장이었다.
항해당직 외에 일등항해사의 다른 업무는 화물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의 화물수령증(mate's receipt)으로 선하증권이 발행되고 그의 양도협정서로 세관의 통관절차가 개시된다. 그러자니 본선의 하역작업 일체가 그의 지휘로 이루어진다.

그의 적하계획서(stowage plan)에 하역, 검량 검수, 고박 등의 용역이 동원된다. 그리하여 태평양 양안의 십여 항구를 복잡하게 오고가는 화물들이 서로 뒤엉키지 않으면서 선창(船艙)의 공간과 무게톤수를 꽉 채운(full and down) 선체는 전후좌우의 균형과 적정의 복원력으로 항해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들의 작업을 감독하는 항해사들에겐 항구의 정박지가 풍파의 바다보다 힘들고 고단하기 마련.

그래도 한국과 일본 등 태평양 서안의 항구에서는 한결 나은 편이었다. 작업자들이 항해사의 지시에 일사불란 따라주었다. 그러나 일부변경선 너머 북미대륙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일 철야작업에 미국의 하역관련 법규가 괴팍했다.

배를 오르내리는 트랩은 안전그물로 받쳐져 있어야 하며 부두에 얹힌 발판 밑의 그물은 발판보다 5피트 이상 길고 넓게 깔려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람에 접혀 있어도 하역인부들은 승선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작업시간으로 계산한다.

당시 한국에서 저가로 수출되던 금성라디오를 인부들이 작업 중에 훔치는 일이 잦았다. 면도날로 판지 포장을 긋고 알맹이를 파커 속으로 감추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보통선원들은 그들의 작업현장을 입회하지 못 한다. 일등국가임을 자부하는 그들의 규정이었다. 항해사 세 명이 철야작업의 사무실을 지키랴 여섯 선창의 3층 갑판을 오르내리기가 힘에 부치지만 그건 우리네의 옹색일 따름이었다.

그때 미국사회의 동양에 대한 정서는 상당부분 막무가내 편견이었다. 포틀랜드 같은 하항(河港)에서는 후진국의 기생충 알을 배출한다는 구실로 동양에서 가져온 음식물 일체를 출항 시까지 밀봉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조치에 대한 심한 반감은 없었다. 그때 이미 올림픽을 개최한 지 십년이 되는 일본도, 동양의 선진인 싱가포르까지도 다를 바 없는, 일부변경선 서쪽의 것들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영국, 독일 등이 세계의 해운을 주도하고 있었고 미국은 지구상 최대의 선진국이어서 그들의 제도나 관행은 누구라도 배워 익혀야 할 덕목이었다. 그런 선진 문물을 최전방에서 접하면서 수출입국(立國)에 일조하는 대미(對美) 정기선 일등항해사의 자부심이 도리어 뿌듯했다. 그때 우리들이 실어 나르던 밀은 포장 마대에 손목 없는 두 손의 악수 모습이 선명하게 찍힌 미국의 원조물자였고, 우리나라의 외교, 경제력은 아시아에서도 바닥권이었던 시대의 배경 탓이기도 했으리라.

그러던 내가 하선을 결심한 것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항에서였다. 모처럼의 짬에 저녁 외출을 했다가 술을 마시고 귀선하는 중이었다. 어느새 하얗게 날이 새는 부두를 타박타박 걸으면서 문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젊음을 너무 안일하게 보내고 있다는 자성이었다. 삼 년여의 항해에 나도 모르게 누적된 땅 냄새에의 변덕이기도 했으리라. 스물여덟 살이던 해의, 일등항해사 2년 경력의 종지부였다.

그로부터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 가끔 일등항해사 시절의 꿈을 꾼다. 여전히 아침저녁의 별을 재고 화물 선적작업에 골몰한다. 이제는 지구상의 해운 실무에서 사라진 일들이다. 내가 하선하던 칠십 년대 초반부터 진척된 정기선의 컨테이너화는 항구의 하역일체를 육상 사무실의 컴퓨터 작업으로 전환시켰다. 의당 일등항해사의 화물수취증도 선적계획서도 없어졌다.

밤하늘의 별을 찾는 일도 사라졌다. 지금은 자동차마다 달고 다니는 위성항법장치가 배의 경․위도를 아라비아 숫자로 명시한다. 어쩌면 해운관련 박물관에나 있을, 당시의 섹스턴트가 이제는 항해의 법정비품이 아닌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이 들면서 잦아진 꿈속의 나는 여전히 그때의 일등항해사다. 일본의 어느 항구를 입항하면서 부두에 산처럼 쌓인 화물더미 앞에서 내가 저걸 다 실을 수 있을까 당혹스럽던 일, 오리온 좌의 베텔게우스(Betelgeuse)를 오락가락하는 수평선 위로 얹느라 전전긍긍하던 장면들이 생시처럼 선연하다.

그때 하선 후, 의욕과 보람으로 시작한 육상의 직장생활이 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해지면서 항해가 대안으로 떠올랐을 때, 다시 바다로 나가서 견습선장을 거쳐 정식 선장까지 지냈건만, 줄기차게 일등항해사 시절의 안타까운 꿈만 꾼다. 하늘 까마득한 티모르 섬들의 수직암벽, 쪽빛 산호해의 상아빛 대보초(大堡礁) 등 선장시절의 여유롭던 장면들은 아무리 용을 써 봐도 꿈으로 재생되지 않는다.

아마도 내 깜냥에는 기껏 일등항해사가 제격인 모양이다. 그것도 이제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린, 케케묵은 시절의 ‘칩 오피서.’ 그러나 한편, 고속도로의 운전수처럼 계기판만 보면서 대양을 달음질치는 요즈음의 그들보다는 나의 구식 일등항해사가 훨씬 더 멋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면서.(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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