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닐곱 살 머슴애 같은 수필을…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예닐곱 살 머슴애가 동네 아이들과 흙장난하다 집으로 들어온다. 흙먼지를 둘러쓴 몰골이 꾀죄죄하다. 엄마는 머슴애를 달랑 안고 욕실로 간다. 머리를 감기고 얼굴과 손발을 씻기고는 수건을 건네며 “물기 없이 잘 닦아라. 옷 갈아입고 저녁먹자”하곤 ‘저것이 내가 배 아파 낳은 것인가!’라며 흐뭇하게 바라본다.

거실로 나오는 머슴애는 아까완 딴판이다. 빗질을 안 해 머리칼이 삐죽삐죽 치솟은 맨얼굴이 우유 빛으로 뽀얗다. 눈 코 입이 또렷하다. 균형 잡힌 얼굴이다. 사랑스럽다. 예닐곱 살 머슴애 같은 해맑은 수필이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응, 그래~”

무얼 해달라고 하는지, 무얼 해주겠다고 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머슴애와 엄마는 눈빛으로 알아차린다. 부연(敷衍)이 없어도 독자가 행간(行間)을 읽을 수 있는 수필을 쓰고 싶다. 엄마의 지순한 사랑을 먹고 자란 머슴애처럼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수필이면 얼마나 좋을까!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로 치장한 미사여구의 수필은 싫다. 손가락으로 물을 톡톡 튀기는 고답적인 수필은 더욱 싫다.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듯 난해한 수필은 더더욱 싫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숙성된 정서를 붓 가는 대로 담담하게 그린 수필이 좋다. 고운 서체와 여백있는 글귀로 독자가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수필이 더욱 좋다. 꼭 알맞은 낱말을 골라 꼭 알맞은 자리에 정확하게 꽂은 간결한 수필이 더더욱 좋다.

참 어렵다. 어휘도 가물거리고 감각도 둔해 글쓰기가 난감하다. 수필 한 편을 열 번 스무 번 주물럭거린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틀린다. 내 국어 실력이 태부족함을 한탄한다. 더욱이 내 고향 사투리 발음이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태생적이라 어쩔 수 없다. 하여, 국어사전을 몇 번이고 뒤적인다. 내 자신과 싸우다보면 ‘내가 말장난을 하는 건가, 글 장난을 하는 건가’란 회의가 든다. 이 나이에 가파른 고갯길을 넘기가 힘들어 무력감이 밀려온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발을 버둥거리며 슬피 우는 아이, 시부모 섬기고 자식 키우느라 자신을 불태운 석녀(石女), 가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도 아내에게 구박받는 초라한 남자. 이들의 사연들을 담백하게 쓰고 싶다.

안방에 감추어두고 홀로 감상하는 상큼한 백자(白磁)보다 부엌에서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놓고 밥도 국도 반찬도 담는 막사발 같은 소탈한 수필을 쓰고 싶다.

머슴애가 엄마 목을 꼭 껴안고 “엄마~”
엄마는 “왜!”
“엄마 냄새가 너무 좋아”
“나는 네 모두가 다 좋아”라며 머슴애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맞춘다.

피천득은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라 했다. 산뜻한 색상, 은은한 향기, 단아한 모양, 고상한 에로티즘을 완곡하고 은근한 표현이 아름답다. 허나, 나는 그런 경지에 달하지 못한다. 그저 막사발이 하얀 속살을 드러내듯 예닐곱 살 머슴애 같은 수필을 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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