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인생 외길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나는 문인들 모임에 참석하기를 꺼린다.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동떨어져 낯설고 어색하다. 끌어다놓은 보리자루가 따로 없다.

다른 이유도 있다. 문인들은 일반적으로 자기표현 개성이 강하다. 나 역시 두루뭉술하지 못한 성격이라 잘 어울리질 못한다. 해서 문인단체 가입도 주저된다. 또 다른 이유라면 오랜 세월 함께한 지인들이 내가 늘그막에 수필을 쓴다고 떠들썩하면 역겨워할 것 같아 조심스럽다.

그런 내가 수필인생 외길을 걸어온 원로 수필작가의 팔순 생신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참석했다. 그분과 각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비문학 서적을 이것저것 썼다. 세상 떠날 때가 가까워지는 것 같아 내 삶을 되돌아볼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감생심 문학성이 있는 글은 못 쓸망정 보고 듣고 느낀 주변 이야기를 노변정담(爐邊情談)으로 진솔하게 엮고 싶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로서 문학적인 소양과 기법이 필요했다. 누구의 소개도 없이 수필교실을 찾아가 그분을 지도교수로 모셨다.

겁도 없이, 수필도 아닌 수필을 거의 매주 한 편씩 써 지도를 받았다. 제목부터 끝맺음까지 하나하나 촘촘히 살펴주고 글의 흐름도 바로잡아줬다.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그분의 지도로 빠르게 발전돼 등단했다. 이사를 하고서 2년쯤 끊여졌다 다시 지도를 받게 됐다.

그분은 6·25전쟁 때 고향에서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했다. 1·4후퇴 때 빈 드럼통을 타고 영하의 대동강을 건너 월남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고달픈 생활을 감당 못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나 부산항 부두에서 생활전선과 맞부딪쳤다.

주경야독을 하느라 초급대학 2년을 8년만에 졸업했다. 끈기와 인내로 정진해 우리나라 최초로 수필문학박사 학위를 쟁취했다. 이를 형설의 공이라 하는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입선했다. 또다시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에도 당선되어 수필인생을 택했다. 수필현장에서 50년간 교육자로서, 작가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발행인으로서 수필인생 외길을 걸어왔다.

자식들이 잔치자리를 마련하고 문하생 111명의 수필을 봉정하는 팔순 축하연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품위 있는 향연이었다. 몸과 마음을 닦고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문구가 생각났다. 먹고살기 힘들어 산아제한을 하던 시절에 4녀 1남을 낳아 정상급으로 양육했다. 물론 그들의 배우자들도 정상급이다.

손자 손녀 열 명이 협연하는 미니 콘서트를 여섯 살 꼬마 손자가 앙증스럽게 지휘를 했다. 하객들에게 웃음꽃을 듬뿍 안겨주었다. 박수소리가가 우레 같았다.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다. 이런 축복이 어느 가정에 또 있으랴.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백배 열매를 맺는다 했다. 허나, 자갈밭에 떨어진 혈혈단신이 온갖 간난(艱難)을 겪으며 백배 열매를 맺은 생생한 교훈이 됐다.

북녘 땅 지하에 계신 조상님들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여든 살 기림문집의 제목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이다. 하늘의 은총과 조상의 음덕에 대해 감사의 뜻이 담긴 제목이다.

문학계에도 권력이 있어 그것을 거머쥐려고 문인들이 몰려다니는데 그분은 초연했다. 오로지 제자 양성에만 열정을 쏟아 문하생들이 문단(文壇)을 이뤘다. 계간으로 발행되는 수필전문지가 23년간 단 한 번도 결간(缺刊)하지 않았다. 남의 손에 의존하지 않고 손수 원고청탁을 하고, 편집과 교정을 하고, 출판비용을 마련했다. 수필이론을 집필해 매회 게재했다. 초인적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문하생들은 팔순을 기념해 문학상 제정을 위한 종자돈을 마련했다. 한국문학사에 금자탑으로 우뚝 솟아 길이 이어가길 기대한다. 살아서는 수필인생(隨筆人生) 외길을, 죽어서는 수필영생(隨筆靈生) 외길을 걸어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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